[이데일리 노희준 기자] “억울한 사람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게 중요합니다”
‘재심 전문 변호사’로 알려진 박준영(사진·44) 변호사. 그는 재심의 문턱을 낮추기 위해 검찰과 경찰, 법원이 사건의 이면과 억울한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더 많이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심은 법원의 확정판결로 종결된 사건의 옳고 그름을 다시 심판하는 비상 구제수단이다. 검경이나 법원이 종결된 수사와 판결에 문제가 있다고 스스로 시인할 때만 가능하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재심 인정이 어렵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박 변호사는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 △삼례 나라수퍼 3인조 강도치사사건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 등에서 법원이 확정한 범인들의 무고함을 밝혀냈다. 그는 익산(약촌오거리) 사건을 극화한 영화 ‘재심’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친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중인 김신혜씨의 재심이 확정돼 화제를 모았다. 재심제도 전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박 변호사를 서울동부지검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났다.
“살인했다고 허위 자백할 수 있어”
재심은 상식과의 싸움에서 시작된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죽이지도 않았는데 허위로 죽였다는 자백을 어떻게 할 수 있지”, “3심제 하에서 그간 잘못이 없다고 호소도 할 수 없었다는 건가”라는 의문이 재심에 앞서 떠오르는 건 상식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상식이 통하려면 해당 사건에 폭행과 회유, 협박 등이 수반되는 불법 강압 수사가 없었고 국선변호인 등이 피고인을 제대로 조력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하지만 삼례·익산 사건에서 수사기관은 폭행과 불법 수사로 엉뚱한 이를 허위자백으로 몰았다.
삼례 사건의 무고한 3인조를 수사한 완주 경찰서 형사들은 현장검증 공개 장소에서 욕설을 퍼붓고 3인조를 폭행했다.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 사건을 수사했던 익산경찰서 형사들도 살인 누명을 썼던 최모씨를 모텔로 끌고가 폭행했다. 경찰의 위법 수사를 통제해야 할 검찰은 이를 외면했고 오히려 두 사건에서 진범이 유력한 피의자를 풀어줬다. 대법원 역시 검경의 부실 수사를 그대로 인정했다.
박 변호사는 “살인에 대한 허위 자백이나 피고인의 진술 번복이 실제 일어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런 이해 속에서 피고인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피고인 처지에 무조건 몰입하다 생기는 위험성은 경계했다.
“억울한 사람도 결이 다릅니다. 남의 고통을 배려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자기를 왜 도와주지 않느냐고 따지는 사람도 있고 자기 억울함을 너무 확대하는 사람도 있죠. 고통을 부풀려 악인을 만들면 억울함을 준 사람도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먹고 살려고 국선변호 맡았다가 재심 전문으로
“삼성도 지원하고 대형 로펌에도 지원했었어요. 거기에 붙었으면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을 겁니다. 원래 편하게 살면서 적당히 공익적 일을 하려던 속물이었습니다”
그는 애초 ‘흙수저 변호사’였다. 전남의 작은 섬 노화도에서 태어나 고졸 출신이다. 학창시절에는 어려운 형편 탓에 학업을 이어가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군복무 중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선임병을 따라 사시에 도전, 턱걸이 합격했지만 신세계는 열리지 않았다. 그는 “학연과 인맥도 없는 데다 떠안은 집안의 빚 문제로 사법연수원을 중도 휴학하는 등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돌이켰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매달린 게 국선변호였다. 그러다 인생을 바꾸게 한 수원 노숙소녀 살인 사건을 운명처럼 만났다. 이후 주위의 권유와 부탁으로 수임 사건이 꼬리를 물며 지금에 이르렀다.
수원 노숙소녀 살인 사건은 2007년 5월 수원의 한 고등학교 화단에서 10대 노숙소녀가 폭행을 당해 숨진채 발견된 사건이다. 당시 경찰은 노숙인 두 명과 가출 청소년 5명을 범인으로 지목했지만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주범까지 재심 등을 거쳐 모두 무죄로 결론이 났다.
박 변호사의 다음 행보는 무엇일까. 그는 2009년 발생한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살인 사건의 재심 추진을 검토 중이라고 귀띔했다. 현재는 문재인 대통령이 변호를 맡았던 엄궁동 사건(1990년 부산 낙동강 변 엄궁동 갈대밭에서 일어난 살인)재심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