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aily] 실로 오랜만에 한국은행 외환보유액 관련 기사가 외신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97년 외환위기 이후 거의 처음이니까 약 8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셈이다.
외환보유액이 이처럼 이슈화 되고 있는 것은 그 규모가 2000억달러를 넘어섰다는 점과 한국은행이 밝힌 외환보유액 투자대상 다변화 계획이 주요 배경으로 여겨진다.
◇ 외환보유액, 적정 규모 논란에 휩싸여
외환위기 당시 39억달러에 불과했던 외환보유액이 이제 2000억달러를 넘어섰으니 그 양적 팽창이 놀랍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다시는 외환위기로 인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이라는 치욕적인 사태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다소 안심이 되기도 한다.
외환보유액이 급증하면서 적정 보유규모에 대한 논란도 동시에 제기되고 있다.
어느 정도의 외환보유액이 적정 규모인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기준에 따라 다른 평가가 나올 수 밖에 없어 천편일률적으로 판단할 수 없지만 각종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 외환보유액 규모가 많은 것만은 틀림없고, 따라서 초과 보유분에 대한 수익성 제고가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정부는 KIC 설립을 통해 외환보유액의 수익성을 높이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는데 외환보유액 운용의 ABC라 할 수 있는 안정성에 대한 논란으로 비판 또한 만만치 않다.
◇ 이론적으로는 고정환율에서만 필요
외환보유액의 재이슈화는 이와 관련된 논쟁거리를 새삼 상기시킨다.
앞서 언급한 적정 보유규모를 비롯해서 외환보유액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과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 이후 각국의 외환보유액이 급증한 배경 등이 그것으로 공부하는 셈 치고 다시 한 번 살펴보는 것도 시간낭비가 되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사실 외환보유액은 이론적으로 고정환율제도에서만 필요한 것이다. 자국의 통화를 특정 통화에 고정시켜 놓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환시장 개입이 불가피하며 이런 과정에서 외환보유액이 반드시 요구되었던 것이다.
브레튼우즈 체제 하에서 각국은 일정 수준의 외환보유액을 꾸준히 유지해 왔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반면 변동환율제도에서 환율은 외환시장에서의 수급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외환당국이 개입할 이유가 없고 따라서 외환보유액이 불필요하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은 이론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브래튼우즈 체제가 붕괴된 71년8월 각국 중앙은행들은 고정환율제도가 변동환율제도로 이행됨에 따라 환율 유지를 위한 시장개입 필요성이 사라졌고 결과적으로 외환보유액에 대한 수요가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중앙은행들의 외환보유액은 73년 3월 이래로 큰 폭의 증가세를 이어갔고 아시아를 휩쓸었던 97년 외환위기는 이 지역 국가들로 하여금 경쟁적으로 외환보유액을 늘리는 계기로 작용하여 한국을 비롯한 일본, 중국(홍콩 포함), 대만, 싱가포르,인도 등의 총 외환보유액은 무려 2조2605억달러(2005년1월말 기준)에 달했다.
변동환율제도 하에서 각 중앙은행들의 이와 같은 외환보유액에 대한 수요 증가는 무엇보다도 환율의 안정적 흐름을 유지하려는 의도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환율을 오직 시장에서 결정되도록 놓아둘 경우 변동성이 급격히 확대될 수 있고 이러한 변동성 확대는 특히 신흥시장(emerging markets)에서는 정치 경제적 불안감으로 연결될 수 있어 외환당국은 변동환율제의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소위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의한 자유방임적 환율 결정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한편 외환보유액은 중앙은행 포트폴리오에 있어서 다른 여러 자산 중의 하나(The Asset-Choice Model)라는 80년대 초반의 연구결과는,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에 대한 수요는 포트폴리오 내 자산들의 상대적 수익률 변화에 민감하며 동 모델에 의한 수익률이 외환시장개입 모델(The Intervention Model)의 그것을 능가하는 것을 보여준다.
◇ 비오는 날 대비해 노아의 방주 만들 필요 있나
외환보유액의 적정 규모는 항상 논쟁거리를 제공한다.
IMF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였던 로고프(K. Rogoff)는 “비오는 날에 대비할 필요는 있지만 그렇다고 노아의 방주를 만들 필요는 없다”는 표현으로 지나치게 낮거나 혹은 높은 외환보유액을 경계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적정 규모에 대한 정답은 없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정답이다.
과거에는 3개월치 수입금액 또는 (수입/외환보유액)비율의 30~50%가 적정 외환보유액의 기준으로 IMF에 의해서 사용되었으나,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에는 단기부채가 수입금액을 대체하여 외환보유액의 적정 기준을 산정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
`대외대차대조표법(External Balance Sheet Rule)` 또는 ‘기도티 모델(Guidotti Rule; 아르헨티나 전 재무장관 Guidotti가 처음 제안)`이라고 알려진 이 기준에 따르면 한 국가의 외환보유액은 1년 이내에 만기가 도래하는 대외차입금 규모를 상회해야 한다.
이후에도 적정 외환보유액을 산정하기 위한 노력이 꾸준히 전개되었는데, 2001년 IMF는 신흥국가들을 위해 통화량(monetary-based)과 대외채무(debt-based)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기준을 마련하였다. 학계에서는 외환보유액의 기회비용을 이용한 기준(Frenkel-Jovanovic)과 실질 GDP 및 총인구, 실질 수출금액 변동성, GDP에서의 상품 및 서비스 수입 비중, 환율 변동성 등을 변수로 복잡하게 계산한 방법(Aizenman-Marion) 등도 제시하였다.
넉넉한 외환보유액은 여러가지 이점을 가져온다. 서두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외환위기 또는 갑작스런 해외자금 유입의 중단(sudden stop) 가능성을 축소시키며 해외로부터의 자금 차입 비용을 절감시켜주는 효과(lower external borrowing costs)가 있다.
97년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역내 국가들은 통화스왑을 골자로 한 통화안전망 설치 및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hiang-Mai Initiative) 등 위기의 재발 방지를 위해 공조노력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공조노력보다는 외환보유액 확충에 더 주안점을 두어 충분한 외환보유액 만큼 확실한 위기 재발 방지대책은 없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 주었다.
이에 곁들여서 충분한 외환보유액은 환율 변동성을 다소 감소시키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외환보유액보다 경제 자생력 키워야
이제까지 외환보유액은 별로 큰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과다한 외환보유액은 별로 문제시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제 금융시장의 가장 큰 관심사는 부도 위험(default risk)에 있는 만큼 외환보유액 부족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지만 적정 규모를 초과하는 외환보유액은 지금 당장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주목을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97년 아시아 외환위기가 한국을 비롯한 역내 국가들의 외환보유액 확충정책에 그동안 정당성과 당위성을 제공한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이제는 적정 수준을 초과하는 외환보유액에 대한 기회비용 및 평가손, 그리고 자산가격에서의 거품 발생 가능성 점증 등 각종 사회·경제적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어 정책 방향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국제외환시장에서 하루 거래량이 1조5000억달러가 넘는 상황에서 어차피 2000억달러의 외환보유액으로는 투기세력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국가 경쟁력 및 경제의 자생력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하는 것이 위기 재발을 방지하는 데 더 효과적일 수 있는 것이다.
(KB선물 투자전략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