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보경 김국헌 기자] `공적자금 등 투입자금 17조, 예보기금 적자 3조`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이후 고질적인 저축은행의 부실이 국민경제에 미친 악영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성적표다.
외환위기 때 은행이 수혈받은 공적자금은 87조원으로 절대적인 규모가 훨씬 크다. 그러나 자산규모를 감안하면 은행(자산규모 1722조)에 투입된 비율은 5% 수준이지만 저축은행(86조5000억)의 경우 20%에 달한다. 저축은행 부실의 심각성이 더 컸다는 얘기다.
더 큰 문제는 외환위기 때 부실이 정리된 은행과는 달리 저축은행의 부실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온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저축은행 부실의 `악순환 고리`를 끊지 못한 배경은 어디에 있을까.
금융당국의 임기응변식 정책과 뒷북 감독, 저축은행을 사금고로 여기는 대주주의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의 합작품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경제개혁연대 소장인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저축은행 위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지만 당국이 근본적인 치유를 강구하기 보다 미봉책을 쓰면서 부실을 키웠다"고 지적했다.
◇ 당국, 근시안으로 저축銀 벼랑 끝으로 몰아
금융당국은 저축은행 부실 문제가 곪아서 터져야만 대책을 내놓는 자세로 일관해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내가 책임자일 때만 문제가 생기지 않으면 된다"는 폭탄돌리기식 보신주의가 금융당국에 팽배해 있었다는 지적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문제는 위기 때마다 내놓은 정책이 결과적으로 더 골치 아픈 문제를 초래했다는 것. 또 그러한 문제가 발생하고 나서야 감독을 강화하는 `사후약방문식` 처방의 반복이었다. 부실이라는 환부를 도려내거나 리스크관리 등 저축은행의 체질을 개선하려는 근본적인 대책과는 거리가 먼 미봉책에 그쳤던 셈이다.
외환위기 이후 금융당국은 저축은행이 어려울 때마다 `규제완화`라는 당근을 던져줬다. 물론 `규제완화`라는 원칙 자체를 문제 삼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에 걸맞는 리스크관리 등 선결 요건이 부재한 상태에서 `규제완화`는 `쏠림현상`이라는 위기의 단초를 제공하는 역할로 귀결됐다.
권택기 한나라당 의원은 "금융기관으론 금융위, 금감원의 관리 감독을, 예금자보호법으로 보호 받는 부보금융기관으로선 예금보험공사의 감시를 받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사전 감시 기능이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눈덩이 같은 부실의 결과를 낳은 소액 신용대출과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관련 정책이다.
금융당국은 지난 2001년 7월 서민금융 활성화 방안으로 저축은행의 소액 신용대출을 장려했다. 점포를 세우고 계약 직원을 뽑아 영업하고 대출을 쉽게 내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카드사태로 인해 부실이 눈덩이 처럼 불어나면서 30여개의 저축은행이 문을 닫고 말았다.
2006년 8월에는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 8% 이상, 고정이하 여신 8% 이하인 일명 `8·8 클럽` 저축은행에게 한 기업당 대출한도 80억원 규제를 풀어줬다. 그러자 저축은행은 경쟁적으로 `몰빵식` 부동산 PF 대출에 뛰어들었다. 위험도가 높긴 했지만 고수익이었고 한번에 수백억원씩 투자할 수 있다는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부동산경기가 장기 침체국면으로 진입하면서 `PF 대출`은 지뢰밭으로 변하고 말았다.
저축은행 한 관계자는 "2000년대초 담보 대출만 했던 저축은행이 개인 신용대출로 눈길을 돌리게 한 것은 당국이었고 부실 저축은행을 퇴출시키지 않고 다른 저축은행이 인수하도록 유도한 것도 당국이었다"고 털어놨다.
다른 관계자는 "PF대출이 고수익인 만큼 고위험인 줄 알지만 신용대출에서 쓴 맛을 보고 더이상 저축은행만의 먹거리가 없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해명하면서 "정부도 2000년대 초반에는 PF가 선진화된 기법이라고 해놓고 이제와서 모든 문제의 원인을 PF대출로 몰고 있다"고 말했다.
◇ "내 은행이니까 내 금고"..오너 리스크에 무방비
| ▲ ※출처: 금융감독원 2009년 국정감사 제출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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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정책 실패와 허술한 감독이 있었다면 안에선 오너 리스크가 도사렸다.
지난 1972년 8월 사채업자와 무진회사(영세 상공인들 사이에서 일종의 계를 운영했던 업체)를 양성화하기 위해 시작된 상호저축은행 제도는 태생부터 오너 리스크를 내포했다. 벤처 붐이 일 때는 벤처투자자들이 저축은행을 인수해 M&A 자금줄로 악용했다.
2000년대 초반 3대 벤처 비리인 진승현 게이트, 이용호 게이트, 정현준 게이트는 모두 저축은행이 관련돼 있었다.
최근에도 저축은행을 사금고로 여기는 대주주 때문에 불법대출과 회계장부 조작 등은 수시로 일어나고 있다. 영업정지를 당하거나 M&A로 대주주가 바뀐 저축은행의 대주주가 불법대출로 고발되는 경우는 다반사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저축은행 재무제표에 대한 불신은 여전한 상황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2005년에서 2008년까지 4년간 저축은행의 위법부당 금액이 무려 7조8000억원에 달했다.
지난 2009년 영업정지를 당했던 전북저축은행 대주주는 수십계의 계좌로 불법대출을 받고 이를 사업자금과 건물신축 등 개인 용도로 사용한 것이 포착됐다. 으뜸저축은행은 동일인신용공여한도를 초과해 불법으로 대출하고 대주주가 임원들과 공모해 횡령한 혐의가 드러났다.
전일저축은행의 경우 불법대출과 기장납입(들어오지도 않은 자본을 들어온 것처럼 위장하는 행위) 사실이 밝혀졌다. 지난해 4월 저축은행중앙회가 인수한 하나로저축은행도 최근 대주주가 불법대출을 알선해 수수료를 챙긴 것이 검찰 수사 결과 드러났다.
문을 닫은 저축은행 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가뜩이나 부실 PF대출 문제가 시끄러울 때 대형저축은행에서 불법행위가 대거 적발됐다. 수백억원의 불법대출, 대출 연체이자 부당 감면, 법에서 허용하지 않는 장외선물환계약 체결, 지급보증서 불법발급, BIS비율 과대산정 등 불법행위가 잇따랐다.
최근 영업정지된 삼화저축은행도 오너 리스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삼화저축은행의 실질적인 소유주인 신삼길 명예회장은 귀금속으로 번 돈으로 지난 2002년 삼화저축은행을 인수했지만 지난해 대법원에서 금괴 변칙 유통으로 조세 포탈한 혐의로 징역형을 받았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은행은 대주주 지분이 4%로 제한되지만 저축은행은 100%를 소유할 수 있어 대주주 전횡이 쉽게 일어나는 구조"라며 "손실이 나면 예금보험공사가 보전해주고 이익이 나면 대주주가 가져가기 때문에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상조 교수는 "세계 어느 나라도 서민금융을 시장원리에 맡기는 나라가 없다"며 "지속적인 감시와 관리감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