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신용분석의 정의를 다시 살펴보면 가장 앞에 차입금이 있다. 신용분석의 출발은 차입금이다. 그런데도 차입금은 통상 분석이 아니라 서술의 대상으로 취급된다. 과연 그것이 그렇게 가벼운 일인가?
모든 신용위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차입금 조작이다. 불법적인 회계분식이 전부가 아니다. 금융신상품의 등장은 합법적인 조작의 길을 넓혀 놓았다. 투자자와 `질서관리자` 모두가 그저 조심, 또 조심하지 않으면 하릴없이 어리석은 바보가 되고 만다.
◇ 아픈 과거 `무역금융과 은행 Loan Sale`
먼저 우리의 어리석음에 대해 자아비판을 해보자.
신용사고가 가장 빈번한 것이 바로 무역금융이다. 대부분 금융관행이 회계분식의 방패가 된다. 마냥 늘어나는 무역금융을 방치하다가 어느 순간 보니까 무역금융이 부실 관리자금으로 사용되고 있더라는 것이 가장 흔한 레퍼토리다. 속지 않는 방법은 간단하다. 무역업무의 일반적 프로세스를 일정수준 넘어서는 무역금융 규모만큼의 분식이 있다고 `간주`하면 된다. 쉽다. 단지 뻔히 알면서도 그리 행하지 못할 뿐이다. 고도성장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다.
신용카드 거품을 키우는 데 일조한 것으로 은행의 대출채권매각(Loan sale, 연계금융)이 있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래였다. 카드사는 엄연한 차입금을 부외처리(off balance)를 했고 은행은 가계금융으로 취급해서 동일인여신한도를 비켜갔다. 이렇게 공급된 자금으로 신용카드 거품의 마지막 페달을 밟았다.
2002년 중반 당국이 이상한 자금흐름을 발견하고 규제(02년 10월)하면서 이 자금의 대부분이 MMF로 옮겨 갔고, 이는 2003년 3월 SKG충격으로 촉발된 MMF환매사태가 카드위기로 확산되는 이유가 된다. 이처럼 은행이 부풀린 거품을 채권시장이 얼떨결에 떠안고 외부의 작은 충격에 무너져 버리는 것은 신용위기의 전형적인 전개 패턴이기도 하다.
카드위기 직전의 신용평가보고서를 보면 Loan sale과 관련한 어떠한 문제의식도 발견할 수 없다. 부외부채이지만 은행과의 거래이니 안정성이 높지 않겠느냐는 수준이었다. 아무리 탁월한 신용평가라 하더라도 금융혁신 속에 숨은 가시를 모두 짚어내기는 어렵다. 한 번쯤은 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대응책이 강구되는 것이다. 그래서 차입금의 진실에 대한 고민은 신용분석의 영원한 과제가 된다.
숨어있는 트릭을 짚어 내는 것은 훨씬 더 가치가 크지만 그만큼 어렵다. 지식의 한계보다 더 어려운 것은 적지 않은 마찰을 각오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도 그것이 신용분석의 길이라고 믿고있다.
비교적 간단한 상환우선주 사례부터 살펴보자. 설립 후 5년 동안 무척이나 고생하다가 최근 분기흑자를 시현한 K사의 이야기다. 대표적인 장치산업이지만 투자자금을 자본금보다 주로 차입으로 조달하는 구조라 만성적인 자금부족을 겪었다.
K사에게 2004년은 참으로 힘든 한 해였다. 아직 손익분기점 매출의 확보가능성이 불투명하던 상황에서 투자재원 고갈과 완전자본잠식의 위기상황에 직면했다. 다행히 시장의 평가가 좋아서 대규모 회사채 발행에 성공했고, 연말에는 1000억원 가까운 상환우선주를 발행하여 `가까스로` 완전자본잠식으로의 추락을 모면했다.
2005년에는 약간의 내홍이 있었지만 올해 들어 판매비용을 절감하면서 드디어 흑자전환에 성공한 소위 해피엔딩 스토리다. 그러나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다 합리화되는가?
문제는 상환우선주의 성격이다. 보통 우선주는 회사채보다 후순위로, 회사채 투자자 입장에서는 담보 또는 보험의 성격을 가진다. 그런데 그 상환우선주가 사실은 회사채보다 선순위 채권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K사가 우선주 인수자금 조달을 위한 차입거래에 대해 미래매출채권을 담보로 제공한 것이다. 그리고 이 차입을 바탕으로 ABS가 발행되는 `멋진` 구조화가 성립되었다. 형식적 타당성도 조금 의심스럽지만 그것이 우리의 일차적인 관심사는 아니다.
그보다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투자자에 대한 정확한 정보전달 여부다. 물론 감사보고서 주석사항에는 이에 대한 설명이 있다. ABS에 대한 약간의 지식과 상상력 그리고 집중력이 있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원래 주석사항이란 그런 것이다.
◇ `PF`는 우발채무인가
이제 최근 현안이 되고 있는 PF 우발채무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우려가 제기되고 있지만 논의에 앞서 한 가지는 짚고 가자. 개별 PF의 상태는 대체로 양호하다는 점이다. 간간이 문제가 되는 것도 있지만 소위 사태를 우려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현상 정도로 받아들일 수준이다.
문제제기가 이루어지는 것은 개별 PF의 설계보다는 PF시장 전체의 흐름과 질서에 대한 것이다. 어느 경우든 급성장한 금융시장은 그에 걸맞은 질서체계를 세우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를 소홀히 하면 자칫 위기로 이어지거나 시장 자체가 활력을 잃고 스러져 버린다. 지금의 PF에 대한 논란은 그러한 성숙의 과정으로 이해하면 좋을 듯 하다.
모든 성장에는 과부하의 논리가 적용된다. 잘 다스리면 근육이 되고 잘못 다스리면 염증이 된다. 연착륙(soft landing)의 가장 좋은 방법은 정보투명성을 높이는 것이다. 최근 한국기업평가가 PF 우발채무에 대한 평가기준을 발표한 것은 이런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건설 PF관련 차입금이 시공사의 입장에서 단순한 우발채무인가? 현실적으로 차주인 시행사의 역량을 불문에 부치고, 오롯이 시공사의 신용을 기초로 이루어지는 금융거래를 형식상의 요건을 좇아 우발채무로 간주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나름의 가중치를 붙여 조정부채비율을 발표하는 것으로는 여간 성이 차지 않는 이유다. PF 우발채무는 본 채무에 준하여 관리되어야 마땅하다. 내역이 공개되어야 하고 관련사업장의 진행상황이 검토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투명성 강화는 PF가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달걀을 갖고 싶으면 암탉이 시끄럽게 우는 소리를 참아야 한다.” - 덴마크 속담 -
윤영환/굿모닝신한증권/Credit analy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