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송이라 기자]
직장인 오희성(29·가명)씨는 금융기관에서 비대면 계좌개설이 가능해졌다는 소식에 걱정이다. 5년 전 신분증을 분실한 후 일어났던 사고가 생각나서다. 당시 오씨의 신분증을 주은 사람은 은행에 가서 아무 거리낌 없이 통장과 체크카드를 만들어 대부업체에서 대출을 받았다. 범인이 사용한 체크카드 내역이 기존 고객정보에 등록된 오씨 휴대폰 문자로 오기 전까지 아무도 그의 계좌가 도용됐다는 사실을 몰랐다. 직접 대면하는 거래에서도 이런 사고가 발생하는데 하물며 비대면 계좌가 허용되면 누가 개인정보를 보호해줄지 의문이다.
은행이나 증권사에 직접 방문하지 않고도 계좌를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특히 그동안 은행에 비해 오프라인 점포가 턱없이 적어 은행에서 대신 계좌를 열어줘야 했던 증권사들이 반색하고 있다. 다만 도입 초기인 만큼 혹시라도 발생할 수 있는 IT 사고에 대한 관리·감독에는 소홀하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은행에 이어 지난 22일부터 증권사와 자산운용사, 저축은행, 농·수협 등 2금융권 금융회사에도 비대면 실명확인 업무를 허용해주면서 증권사들이 일제히 서비스를 출시했다. 키움증권과 KDB대우증권, 유안타, 한국투자, 이베스트투자, 삼성, 대신, 신한금융투자 등이 앞다퉈 서비스를 시작했고 3월 초에도 6~7개사가 서비스를 출시할 예정이다. 은행이나 증권사 같은 판매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온라인으로 펀드를 판매하는 펀드슈퍼마켓은 비대면 계좌개설의 최대 수혜기업으로 꼽히며 오는 5월 서비스 도입을 앞두고 있다.
제도 도입 후 초기 일주일간 반응은 긍정적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그동안 은행에 계좌개설을 위임하면서 울며 겨자먹기로 내던 수수료도 줄일 수 있고 무엇보다 고객기반이 늘어나 증권업계에는 희소식”이라며 “신분증과 스마트폰, 몇가지 본인확인 절차만 거치면 계좌개설이 가능해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등 신상품 출시 성과로도 이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얼굴을 보지 않고 개인정보가 고스란히 노출되는 상황에서 혹여라도 발생 가능한 문제점들을 관리하는 곳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도입 초기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길 수 있지만 금융당국과 금투협회 등 기관들은 특이사항은커녕 일일 신규계좌 수조차 집계하지 않고 있다. 비대면 거래인 만큼 해킹사고 등 곳곳에 보안위험이 있지만 모든 건 개별 금융회사에 맡겨둘 뿐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정부는 제도적으로 비대면 계좌개설이 가능하게 물꼬를 터준 것이고 보안 관련 사고발생 책임은 개별 증권사의 몫”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금융관련 IT 분야는 대형 사고가 터진 후에야 수습하는 사후약방문식 대응이 또다시 반복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 2013년 미국 유통업체 타깃은 개인정보 1억1000만건이 해킹되면서 3조원 이상의 배상금을 냈다. 그러나 국내에선 정보보안 사고는 여전히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다. 황세운 자본연구원 자본시장실장은 “비대면 계좌 개설은 편리함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악의적으로 계좌를 개설해 범죄에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확대된게 사실”이라며 “도입 초기에는 보안 관리가 중요한 만큼 안정적으로 정착할 때까지만이라도 정기적으로 모니터링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