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지침' 첫 호흡 변정주·오세혁 "말의 힘 믿는다"

연극 '보도지침'으로 뭉친 연출가·극작가
정부가 기사위치까지 정해주던
제5공화국 '언론통제 사건' 다뤄
26일부터 수현재씨어터서 공연
"탄탄한 대본과 실력파 배우 시너지
'나를 움직이는 지침' 질문 계기되길"
  • 등록 2016-03-24 오전 6:16:00

    수정 2016-03-24 오전 8:48:16

최근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한 카페에서 만난 변정주(41·오른쪽) 연출과 오세혁(35) 극작가가 함께 포즈를 취했다. 두 사람은 2년여간의 기획기간을 거쳐 제작에 돌입한 연극 ‘보도지침’에서 처음 호흡을 맞췄다. “이 연극을 통해 나를 움직이게 하는 지침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으면 한다”고 입을 모았다(사진=방인권 기자 bink7119@).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페이스북 친구였을 뿐 교류는 없었다. 가끔 SNS에 올라오는 변정주 연출의 글이 좋아 챙겨 읽은 게 전부다”(오세혁). “오세혁 작가에 대한 소문만 듣다가 작업한 연극 두 편을 봤다. 표현이 기발하더라. 작품 제안을 받고 바로 그가 떠올랐다”(변정주).

최근 공연계서 주목받는 ‘핫’한 두 남자가 만났다. 연출가 변정주(41)와 연출 겸 극작가 오세혁(35·극단 걸판 대표)이다. 두 사람은 오는 26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수현재씨어터에서 초연하는 연극 ‘보도지침’을 통해 처음 호흡을 맞췄다.

연극 ‘보도지침’은 내용만 보면 민감하다. 1986년 제5공화국 시절 매일 아침 언론사에 은밀하게 전달된 언론통제 ‘보도지침’의 실제 사건을 법정드라마로 재구성했다. 당시 정권은 언론사에 ‘어떤 내용을 어느 면 어느 위치에 몇단으로 실을지’를 구체적으로 지시했는데 김주언 전 한국일보 기자가 월간지 ‘말’에 문건을 보도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자칫 지난해 공연계 불었던 ‘검열논란’과 겹쳐지면서 무거운 ‘정치연극’으로 오해할 수 있다.

변 연출은 그래서 오 작가에게 러브콜을 보냈다고 했다. “지난해 여름이었다. 사회고발이든 역사극이든 평범하지 않은 극이 나왔으면 했다. 함께 작업한다면 가능할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술김에 ‘오케이’ 했다더라. 하하.” 듣고 있던 오 작가는 “이런 사건인 줄은 다음날 검색한 뒤에 알았다. 알고 난 뒤에 더 하고 싶어졌다. 인연이지 싶더라”며 웃었다.

연출 겸 극작가 오세혁
이명행·에녹 등 핫한 배우도 합류

오 작가는 요즘 가장 바쁜 극작가다. 기발한 소재와 유려한 대사, 따뜻한 웃음이 장기인 타고난 이야기꾼으로 불린다. 이달에만 ‘보도지침’을 포함해 연희단거리패 게릴라극장의 ‘늙은 소년들의 왕국’, 서울시극단의 ‘헨리 4세: 왕자와 폴스타프’ 등 그가 쓰거나 각색한 작품 3편이 잇달아 무대에 오른다. 변 연출도 유쾌하고 날선 연출력으로 배우들 사이에선 함께 작업하고 싶어 하는 연출 1순위에 꼽힌다. 올초에만 뮤지컬 ‘아랑가’와 ‘넥스트 투 노멀’, 연극 ‘날보러와요’ 등을 작업했다.

변 연출은 여기에 “지성미를 갖춘 배우들이 뭉쳤다”고 했다.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만큼 캐스팅은 지성미를 갖춘 배우로 추렸다”며 “이 시대에 필요한 연극이라고 생각해 먼저 일정을 빼놓고 기다린 배우도 있는 반면 소재만 보고 못하겠다는 친구도 더러 있었다”고 귀띔했다. 이어 “연습을 수십번 반복하고 안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작품을 놓고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느냐에 있다. 그 고민이 분명히 무대 위에 드러날 것이란 데에 어떤 의심도 없다”고 했다.

작품에는 실존인물인 김주언 기자 역에 송용진·김준원, 검사 역에 최대훈·에녹, 변호사 역에 이명행·김주완 등이 번갈아 연기를 한다. 오 작가도 “연극만 해온 장용철·김주완 같은 배우부터 이명행·송용진 등 흥행 배우들의 시너지가 더해져 균형이 잘 잡힌 느낌”이라고 덧붙였다.

보도지침 ‘말’에 주목하다

연출 변정주
오 작가는 대본 작업 당시 ‘말’에 주목했다고 했다. “처음 사건만 접했을 때는 웃기게 비틀어서 재미있게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막상 실제 재판기록과 자료를 보니 접근이 다르더라. 피고가 검사보다 더 당당했다. 죄가 없으니까. 실제 독백도 훌륭하더라. 재판기록의 말을 반드시 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나아가서 연극을 하는 우리는 말을 제대로 하고 있나. 내면의 독백은 아닌가. 두 축의 말을 잘 다듬어 구성하고자 했다.”

웃기기 위한 코미디극도 심각한 정치극도 아니다. 말과 말이 팽팽히 맞서는 치열한 재판 과정을 그린다. 연출은 “보도지침 사건이 폭로된 후 폭로한 자가 구속된 자체가 이미 코미디다. 누구는 옛날 얘기로만 느낄 거고 누구는 지금 우리 모습과 닮았다고 할 거다. 해석은 관객의 몫이다. 다만 무겁지 않게 가려고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오 작가는 “대사 한줄 때문에 하루종일 토론하고 싸운다. 셰익스피어 연극이 무수한 세월을 넘어 왜 아직까지 강력한지 더듬어보니 결국 ‘말’이더라. 배우의 말, 우리의 말이 고루 섞여 말이 단단한 작품이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이어 “확실한 건 배우가 무대 위에서 너무 멋지다는 거다. 그냥 서서 자신의 말을 하는데 빛이 난다. 많은 관객이 배우들을 보러 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변 연출도 “연습실을 들여다보니 모두 치열하게 말에 대한 철학을 내뱉고 있더라. 하고 싶은 날 선 말이 오가는 게 이 작품의 매력”이라고 거들었다.

“장소는 법정이 되기도 하고, 말과 말이 오가는 광장, 연극 무대가 되기도 한다”고 오 작가가 말하자 변 연출도 “어떤 재판이나 토론은 굉장히 연극적이고, 또 어떤 연극은 굉장히 치열한 토론장이 되어야 하는데 연습실을 들여다보니 치열하게 말에 대한 철학을 내뱉고 있더라. 하고 싶은 날선 말들이 오가는 게 이 작품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예매 상위권 랭크…공연계 황금 콤비 예고

초연에도 불구하고 ‘보도지침’은 지난 9일 티켓예매를 시작하며 주요 예매사이트에서 1~3위에 랭크돼 주목받았다. 변 연출은 “배우의 티켓파워에다가 역사적 사건을 다루다 보니 연극 마니아는 아니지만 사회정치에 관심 있는 이들이 표를 사더라. 그런 이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목표는 흥행”이라고 웃으며 “다음에도 함께 작업하려고 한다”며 입을 모았다.“내가 어느 지점까지 스토리를 끌고 가면 연출이 잘 다듬어준다. 협업의 시너지가 생긴다”(오세혁). “작업하면서 굉장히 좋았다. 비슷한 가치관을 그리는 작가더라. 특히 작품의 완성을 텍스트가 아닌 공연으로 본다는 면에서 다른 극작가와는 다르다. 함께 작업하기에 좋은 희곡작가라기보다 연극작가다”(변정주).

오 작가가 마음속에 둔 작품의 부제는 ‘나를 움직이는 지침은 어디에서 오는가’다. 오 작가는 “지금도 외부지침에 따르거나 거스르는 사람, 또 균형을 세우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를 움직이는 지침이 어디서 나오는가다. 내 안의 목소리와 자신의 지침을 따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변 연출도 “연극을 보고 난뒤 관객 스스로 나를 움직이는 지침은 무언인지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하는 작품이었으면 한다”고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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