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근심을 잊으리..망우리[땅의 이름은]

태조가 묏자리 정하고 "근심 덜었다"고 해서 생긴 '망우리'
일제시대 공동묘지 지정되고 40년간 묘지 4.7만개 들어서
묘지 기능 다하고 현재는 역사문화공원으로 바뀌어
  • 등록 2024-02-24 오전 9:00:00

    수정 2024-02-24 오전 9:00:00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묏자리를 정하고 궁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훗날 태조가 묻히는 건원릉(지금의 경기 구리시 인창동)에서 한양으로 넘어오려면 고개 하나를 넘어야 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고개를 넘던 태조 일행은 걸음을 멈추고 숨을 돌리기로 한다. 태조는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걱정(우·憂)을 덜었다(망·忘)”고 말했다. 후대는 태조가 근심을 잊은 이 고개에 ‘망우리 고개’라는 이름을 붙였다. 정사가 아니라 야사라는 지적도 있지만 여하튼 이렇게 망우산이 탄생하고, 지금의 서울 중랑구 망우동으로까지 이어졌다.

망우리공동묘지 시절 쓰인 묘지 관리 대장.(사진=전재욱 기자)
조선의 왕이 걱정까지 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인에게 묏자리를 쓰는 것은 중대한 사안이었다. 고관대작은 물론이거니와 여염집 백성까지 먼저 간 가족을 묻을 길지(吉地)를 찾아 헤맸다. 좋은 묏자리라는 건 정해진 게 아니라 각자의 사연에 따라 갈렸다. 예컨대 어린 여자 어린아이가 사망하면 원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사람이 다니는 길에다가 몰래 묻곤했다. 지금으로서는 해괴해 보일 테지만 당시는 관습이었다. 핑계없는 무덤이 없듯이, 묏자리는 각자의 사연을 담았다.

일제강점기 이런 장례 관습은 탄압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시신을 땅에 묻는 게 상식이었지만, 일제는 화장을 도입하고 장려했다. 신통하지 않자 공동묘지를 지정하고 그 지역에만 묘를 쓰도록 제한했다. 반발이 이어졌다. 공동묘지의 묏자리가 시신의 사연을 품어줄지 모르는데다가, 인연이 없는 남의 묏자리와 붙어서 묘를 쓰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일제는 어기면 최대 징역형으로까지 처벌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렇게 탄생한 시내 공동묘지가 신당, 아현, 이태원, 수철(금호동) 공동묘지다.

시내의 공동묘지도 시간이 가면서 공간이 부족해졌다. 일제는 1933년 망우산 일대에 52만평 규모로 망우리 공동묘지를 조성했다. 공동묘지 장례 문화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망우리공동묘지는 한국전쟁 당시는 비명횡사한 무명의 묘지도 품게 됐다. 한용운, 방정환, 유관순 안창홍 등 독립운동가와 이중섭, 조봉암 같은 근현대사 인물이 묻혔다. 1973년에 이르러 공간 부족으로 더는 묘지를 받지 않기까지 40년 동안 묘지 4만7754기가 들어섰다. 계속해서 이뤄진 이장으로 현재(2023년 10월 기준)는 묘지 6579기가 남아 있다. 이제는 이곳을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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