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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C의 모기업인 삼립식품은 초당 허창성(1921~2003) 명예회장이 1945년 10월 서울 을지로에 세운 ‘상미당’에서부터 시작한다. 황해도 옹진군 출신의 허 명예회장은 한국 제빵산업의 선구자로 불린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청년 무렵 해방을 맞은 허 명예회장은 조국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음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생존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바로 ‘먹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허 명예회장은 당시 부족한 쌀 대신 외국에서 싸게 수입할 수 있는 밀가루에 주목했다. 밀가루로 만들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음식이 바로 ‘빵’이었다.
허 명예회장이 세운 상미당은 금새 을지로의 명소로 자리를 잡았다. 본인 스스로 탁월했던 제빵기술사였던 허 명예회장은 단순히 빵을 만드는 것에서 벗어나 제빵이 식품산업의 근간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를 위해서는 대량 생산기술이 필요했다. 허 명예회장은 1949년 ‘무연탄 가마’를 손수 개발한다. 당시 제빵 생산에서 가장 많은 돈이 들었던 연료비를 90%까지 절감하는데 성공한다. 허 명예회장은 이를 바탕으로 사세를 키워간다. 허 명예회장은 상미당을 1959년 4월 삼립산업제과로 키운 후 1968년 6월 서울 가리봉동에 공장을 세우고 삼립식품공업의 대표이사로 취임한다. 을지로에서 시작한 조그마한 빵가게가 식품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허 명예회장은 20여년간 다진 노하우로 ‘크림빵’과 ‘보름달’ 등의 빵을 내놓으며 식품업계의 파란을 일으킨다.
◇ 빵의 비수기를 성수기로 바꾸다
설립 2년만에 삼립식품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허 명예회장은 베이비붐에 태어난 아이들이 겨울철에 먹을만한 간식거리가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여기에 겨울철에는 빵이 잘 팔리지 않아 대리점의 매출이 오르지 않는 것도 신경이 쓰였다. 허 명예회장은 상미당을 운영할 때에도 주변의 걸인들과 어린아이들에게 무료로 빵을 나눠주는 선행으로 유명했다.
호빵은 1971년 10월 출시되자마자 시장을 사로잡았다. 10월 중순부터 다음해 2월까지 삼립 전체 매출의 15%를 차지할 정도였다. 한겨울 3개월만 따지면 전체 매출의 절반에 육박했다. 그야말로 빵의 비수기를 성수기로 바꿔놓은 셈이다. 노릇노릇 구워진 빵에만 익숙하던 소비자들에게 하얗고 말랑말랑하면서 따끈따끈한 쫀득한 빵에 달콤한 단팥이 들어있는 호빵은 신선한 자극이었다.
호빵의 인기가 날로 치솟자 삼립은 서울 가리봉동 공장 호빵 생산라인에 우수 사원들을 대거투입해 제품의 질 향상에 만전을 기했다. 그 후 호빵 생산라인은 눈코 뜰 새 없이 돌아갔다. 가리봉동 공장에서 생산되던 제품 출하량의 절반을 호빵이 차지했을 만큼 인기를 끌어 사무직원들까지 제품 포장에 동원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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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1970년대 TV보급과 함께 선보인 CF도 한 몫했다. “찬바람이 싸늘하게 두 뺨을 스치면 따스하던 삼립호빵 몹시도 그리웁구나”라는 CM송은 가수 김도향의 대표곡으로 여길 정도로 회자되었다.
처음에는 단팥맛 하나로 출발된 호빵은 이후 야채, 김치 등의 새로운 제품으로 확대되며 시판 46년 후인 현재까지도 겨울빵의 대명사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탄생 46주년을 맞은 2017년까지 호빵은 누적판매량이 58억개를 돌파, 연평균 약 1억3000만개를 팔았다. 이는 매년 겨울철 국민 1인당 호빵을 3개씩 먹은 셈이다.
호빵 개발 초기부터 상생경영의 행보를 걸어온 허 명예회장의 뜻은 좋은 품질의 제품과 책임있는 경영을 해 나가겠다는 현재 SPC삼립의 경영기조와 이어진다.
허영인 회장은 올해 신년사를 통해 “원료 선정에서부터 고객에게 제품을 전할 때까지 모든 임직원이 품질경쟁력 향상에 주력해 1등 기업의 완벽한 품질을 실현해야 한다”며 “임직원 모두가 책임경영의 주체가 돼 성과를 극대화해 달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