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의 자체 신용도(독자신용등급)를 공개하는 것은 기획재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반발이 많으니 금융위원회도 모른 척하곤 있지만, 덮어두고 갈 게 아닙니다. 시장이 평가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벌써 몇 년 째 나온 이야기일까. 21회 SRE에서도 어김없이 공기업과 금융지주 계열사의 자체 신용도 도입을 원하는 시장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시장전문가 66% “공기업 포함해야”
‘공기업과 금융지주 계열사를 제외하고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은 16.8%(29명), ‘제도 도입 시기를 좀 더 늦춰야 한다’ 8.7%(15명),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없다’ 8.1%(14명), 기타 0.6%(1명)로 나타났다. 시장은 단연 정보의 전폭적인 공개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금융당국은 지난 3월27일 신용평가제도개선 실무협의와 태스크포스(TF)를 열고, 자체 신용도 공시 제도를 6월 말께 시행키로 의견을 모았다. 현행 기업신용등급의 참조사항이란 점을 강조하기 위해 독자신용‘등급’이 아닌 ‘자체신용도’란 이름을 사용하도록 했다. 정부와 지자체 산하 공기업은 공시 대상에서 제외키로 했다. 금융지주를 포함, 은행과 여신전문금융회사 등 계열사를 공시 대상에 포함할지는 막판 조율 중이다.
시장에선 금융당국이 고심 끝에 민간기업만이라도 자체 신용도 공시 제도를 도입하기로 한 것은 한 단계 진전된 결과라고 평가한다. 지난 2012년에도 금융당국은 은행의 신용도 저하, 공공기관 부채 증가 등에 대응하기 위해 제도 도입을 추진했지만, 끝을 보지 못하고 무산됐다. 세계 경기가 악화하면서 기업의 부담을 의식한 것이다.
하지만, 공기업과 금융지주 계열사는 이번에도 공시 대상에서 빠질 가능성이 커 벌써 ‘반쪽짜리 대책’이란 평가가 나온다. 지난 2012년에는 공기업과 은행의 자체 신용도를 민간기업보다 먼저 공시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지만, 지금 와서 그 순서가 거꾸로 된 것은 아이러니라는 의견이다.
금융당국 “가격 왜곡 우려”
민간기업은 대주주가 지원을 포기하고 꼬리 자르기를 시도한다거나, 자회사가 모회사 증자에 참여하게 하는 등 모회사가 자회사로부터 거꾸로 지원을 받는 일도 간혹 있다. 하지만 공공성이 강한 산업을 영위하는 공기업은 채무 불이행 상황에 빠질 경우 정부가 함부로 지원을 포기할 수 없는 특수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 공기업의 신용등급은 정부 지원가능성을 굳이 배제하고 생각할 필요가 없는데 자체 신용도를 도입하면 오히려 시장이 헷갈릴 수 있다는 게 금융당국의 우려다. 등급을 등급이라 부르지 못하고 자체 ‘신용도’란 단어를 쓴 것도 이것이 실제 공기업의 신용등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자체 신용도를 공시하면 당장 그 기업의 실제 신용등급, 민낯이 공개됐다는 식의 반응이 있을 수 있어 조심스럽다”며 “시장도 고려해야 하지만, 언론과 정치권 등 다른 여론조성자들의 이해도도 무시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게다가 최종 신용등급보다 낮을 수밖에 없는 자체 신용도가 시장에 심리적 부담감을 형성하게 되면 공기업의 조달금리가 오르고 그 비용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 세금의 몫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도 우려하고 있다.
“시장이 판단할 수 있게 해야”
무디스는 현재 우리나라 공기업의 최종 신용등급을 대부분 ‘Aa3’으로 매기고 있다. 이중 한국토지주택공사(LH공사)나 한국광물자원공사, 한국철도공사, 한국정책금융공사, 한국주택금융공사 등의 독자신용등급은 모두 투기 등급인 ‘ba1~b3’ 사이에서 형성돼 있다. 한국광물자원공사의 자체 신용도는 투기등급인 ‘b3’으로 최종 등급 ‘Aa3’와 무려 12단계(Notch) 차이가 난다.
물론 시장 일각에서도 자체 신용도 공개에 따른 충격이 생각보다 클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지금은 공기업의 채권 발행량이 많지 않지만, 앞으로 채권 발행량이 많아지면 조달 금리가 벌어지는 일이 현실화할 것이란 관측이다.
SRE 자문단은 그러나 이 같은 시장 충격이 있을지라도 정부가 공기업의 자체 신용도를 적극적으로 공시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다. 채권의 가격은 정보를 감출수록 왜곡될 뿐 시장이 적응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회사채 시장은 전문성을 갖춘 기관투자자들의 시장이란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자체 신용도를 공시하더라도 이를 실제 등급으로 인식하는 오류는 범하지 않을 것이란 게 그 이유다.
한 자문위원은 “민간기업은 실제로 채무 불이행 상태에 빠질 확률이 높으므로 자체 신용도를 공기업보다 먼저 공시하는 것은 맞지만, 자체 신용도를 공시함으로 인해 공기업의 건전성을 높이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며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이 최선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특히 정보 공개를 꺼리는 것은 결국 정부가 채권 가격 결정에서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고 비판한다. 재무 건전성이 나빠진 공기업의 자체 신용도는 ‘AAA~AA’ 사이에서만 움직이는 최종 신용등급보다 하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부가 대주주인 회사의 신용도가 떨어질 것을 우려해 정보의 장벽을 높이고 있다는 지적이다.
다른 자문위원은 “시장 충격이 문제라기보다는 정부 스스로가 공기업의 통제권이 약해지길 바라지 않기 때문에 자체 신용도 공시를 꺼리는 것”이라며 “의도가 솔직하지 못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 기사는 이데일리가 제작한 ‘21회 SRE’(Survey of Credit Ratings by Edaily)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21회 SRE는 2015년 5월11일자로 발간됐습니다. 문의: stock@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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