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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성대하던 크레딧 시장에 굵직한 이벤트가 발생했다. 이번엔 해외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이 주인공이다. 중국 국저에너지화공집단(CERCG)의 홍콩 자회사 회사채를 기초자산으로 국내에서 발행한 1645억원(1억5000만달러) 규모 ABCP가 채무불이행(디폴트) 상태에 빠진 것이다. 시장 참여자들은 CERCG 발행이후 중국기업 관련 국내 ABCP 발행 대기물량이 엄청났다고 전한다.
다른 하나는 최근 터키발 금융위기 우려가 고조되면서 카타르국립은행(QNB)등에서 정기예금을 기초자산으로 국내에서 발행한 ABCP가 시장을 놀라게 했다. 최근 몇 달간 발행된 규모가 12조원을 넘어서는 것으로 알려지자 일부 머니마켓펀드(MMF)에서 펀드런이 발생했다. 결국 또 ‘쏠림’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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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백한 오산이었다. 국내 기업, 국내 시장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해외 리스크가 국내시장에 고스란히 전이될 수 있다는 걸 고스란히 체감했다.
CERCG 디폴트는 개별기업의 크레딧 문제로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투자위험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진다. 하지만 QNB ABCP는 10조원을 웃도는 규모에 대부분 “깜짝 놀랐다”고 했다. 다른 일각에선 “해프닝”이라고도 했다.
시장의 평가는 이해관계에 따라 다소 온도차가 있다. 그러나 지금이 ABCP시장을 들여다보고 제도를 점검할 적기라는 데는 모두가 공감하고 있다.
자산유동화법에 따라 발행된 ABS는 자산보유자 요건, 연속 및 추가 발행 금지 등의 제약이 존재하고, 유동화 계획, 증권신고서 제출 등 엄격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같은 규제로 인해 상법상 주식회사(SPC)를 설립해 SPC에 자산을 양도하고, 이를 근거로 ABCP를 발행하는 경우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 이같은 유동화는 주로 증권사를 통해 이뤄진다.
CP(ABCP)는 통상 만기 1년 미만, 대부분 3개월로 발행되는데, 지속적인 차환발행을 통해 실질만기는 1~3년이 대부분이다. CP는 자금조달의 편리성 때문에 기업들이 선호하는데, 대부분 3~6개월 차환 발행을 반복하는 만큼 장기채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달비용(금리)도 낮다.
지난 9일 기준 CP발행 잔액은 52조5014억원, ABCP 발행잔액은 104조6006억원에 달한다. 전자단기사채를 포함한 단기금융증권의 총 발행잔액(206조5210억원)중 ABCP가 절반 이상(50.6%) 차지하고 있다.
수많은 신용불량자를 양산했던 2002년 카드사태도 카드사들의 옵션CP가 걸려 있다.
당시 국민의 정부는 세원 추적을 위해 카드 사용을 적극 장려했고, 대학생 등 소득이 없어도 묻지마 카드 발급이 가능했다. ‘카드 돌려막기’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소비가 급증했다.
그 결과 1998년 64조원규모였던 카드 이용실적은 2002년 623조원으로, 현금대출은 33조원에서 358조원으로 10배 내외로 폭증했다. 말 그대로 ‘카드 버블’이었다.
소득없이 빚을 내 과소비한 만큼 연체율도 급등하며, 신용불량자가 양산됐다. 당시 카드사들은 옵션CP로 자금조달에 나섰다.
옵션CP란 발행사와 투신사가 이면계약을 맺어 만기를 1년이상 자동연장하는 식으로 발행한 CP다. 카드사들은 만기 연장 대가로 일반 CP보다 0.2~0.3%포인트가량 추가 금리를 얹어 발행했다. MMF 규정상 1년 이상 CP는 담을 수 없지만, 투신사들도 수익률을 위해 옵션CP를 머니마켓펀드(MMF)에 담았다.
그러나 카드채 상환 문제와 SK글로벌 사태로 MMF 환매 사태가 불거지며 시장은 출렁였다. 2003년말 금융감독원은 옵션CP 문제와 관련, 규정을 위반한 증권사와 투신사에 대해 무더기 제재를 내렸다.
당시 CP 발행규모는 누구도 몰랐다. 감독당국조차 관련 통계치가 없었다. 이후 금융당국은 CP 발행정보 공시 강화에 나섰다. 증권예탁결제원은 2004년 2월 증권사를 통해 유통되는 CP에 등록코드를 부여하며 CP발행정보를 집계하고 있다.
부동산 PF ABCP에서 저축은행 사태 촉발
그러자 PF유동화가 상대적으로 규제가 적은 PF ABCP로 대거 이동하며 ABCP시장이 급격히 확대됐다. 당시 건설사들은 외부 시행사를 따로 두고 지급보증만으로 대규모 차입을 일으켰고, 이를 적극적으로 편입한 저축은행들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저축은행 사태를 맞게 된다. 저축은행 사태의 본질은 과도한 PF대출로 결국 쏠림과 모니터링 부재가 문제였다.
2010년엔 LIG건설이 법정관리 직전 1800억원 규모의 CP를 발행해 문제를 일으켰다. LIG건설 CP 투자자는 약 700명으로 피해액은 2100억원 규모다. 결국 LIG건설은 구자원 회장일가가 사재로 일반투자자에게 전액 보상했으나 구 회장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2013년 10월엔 동양, 동양레저, 동양인터내셔널 3사 등 동양그룹이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계열사인 동양증권을 통해 판매된 CP가 문제였다. 당시 동양 계열사 CP 투자자는 4만여명으로 피해규모는 1조3000억대에 달했다. 여기엔 동양증권이 동양시멘트 주식을 기초자산으로 한 ABCP 1565억원도 포함됐다. 동양그룹의 법정관리 신청 2년전인 2011년 11월 금감원은 동양증권 불완전판매에 대해 조사에 나섰고, 이듬해 9월 동양증권에 기관경고를 내렸다.
2012년 이후엔 차익거래 목적의 ABCP가 크게 늘어났다. 정기예금, 외화예금 등을 기초자산으로 ABCP를 발행하고, 기관투자자들은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MMF에 이를 상당 부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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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간 큰 탈 없이 굴러가던 CP시장에 굵직한 이벤트가 발생했다. 시장 참여자들도 깜짝 놀랐다. CERCG 디폴트가 개별기업의 리스크 부각이었다면, QNB ABCP는 시장 쏠림에 대한 우려가 증폭되는 사건이다.
다만 CERCG ABCP 디폴트와 관련 KTB전단채[채권]종류C(200억원), 골든브릿지스마트단기채1[채권]종류CW(50억원), 골든브릿지으뜸단기1[채권]종류C(10억원) 등 3개 공모펀드에 편입돼 일반투자자들에게 손실을 입혔다.
SRE 자문위원은 “먼저 QNB ABCP 규모가 10조원에 달해 놀랐고, 두 번째로 아무도 몰랐다는데 놀랐다”며 “공시도 안 되고, 집계 시스템도 없어 불안감이 커졌다”고 했다. 다른 자문위원은 “ABCP는 같은 대상을 포장지로 다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라며 “QNB 사태도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하기엔 쏠림에 대한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