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앞둔 딸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에 이름도 생소한 기업어음(CP)라는 것에 투자했다. 은행에 예금하면 3% 이자도 받기 어렵지만, CP에 투자하면 단기간에 8~9%까지 이자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게다가 CP를 발행했다는 동양이라는 기업의 이름은 정인 씨에게도 익숙했다. 기업이 망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뉴스가 쏟아졌다. 동양 그룹의 5개 계열사가 법정관리를 신청했다고 했다. 딸이 모은 5000만원 중 1000만원이라도 찾으면 다행이라고 한다. 정인 씨는 그때 딸의 돈을 은행에 예금하지 않고 지인의 말을 듣고 CP에 투자한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럽다.
국내 재계순위 38위, 동양그룹이 2013년을 흔들었다. (주)동양을 비롯한 5개 계열사가 동시에 기업회생절차 (법정관리)에 돌입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빚을 많이 졌는데 빚을 갚을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기업의 부채가 늘어나 더 이상 경영이 어려운 상황에서 법정관리는 당연한 수순 중 하나로 손꼽힌다. 법정관리에 돌입해 회생하는 기업도 많다. 그럼에도 동양이 산업과 금융 전반에 충격을 준 이유는 여느 기업처럼 자금을 은행이나 기관 등을 대상으로 조달한 게 아니라 일반인을 상대로 회사채와 CP를 팔았기 때문이다.
동양그룹의 계열 증권사인 동양그룹이 판매한 동양그룹 계열사의 회사채와 CP를 산 개인 투자자는 모두 4만9561명으로 5만명에 육박한다. 회사채는 3만2484명이, CP는 1만2353명이 샀다. 동양시멘트 주식을 담보로 발행한 동양의 자산담보부 기업어음(ABCP) 투자자도 4776명에 이른다. 이렇게 동양그룹 계열사가 개인 투자자를 상대로 조달한 자금은 1조5776억원 규모다.
투기등급 채권, 개인 울렸다
문제는 동양이 ‘BB’급, ‘투자부적격(투기)’ 등급의 기업이라는 점이다. 동양과 일부 계열사의 회사채나 CP는 대표적인 ‘고수익·고위험’ 채권이다. 예금이나 펀드를 대신하는 투자로는 원금손실 위험이 크다. 이 때문에 재계 순위 38위 기업이 무너진 것보다 개인 투자자들의 손실과 ‘불완전 판매’가 더 큰 이슈가 되고 있다.
불완전 판매에서는 투기등급인 회사의 회사채와 CP를 일반 개인에게 충분한 설명을 하고 팔았느냐가 핵심이다. 수많은 동양의 회사채와 CP 투자자들은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했고 무조건 동양증권과 동양그룹만 믿고 회사채와 CP를 구매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동양은 전문투자자들조차도 투자를 꺼리는 회사다. 이미 수년전부터 부채비율이 높고 영업활동이 악화돼 재무위험이 큰 기업으로 손꼽혀왔기 때문이다. 동양은 신용등급을 받은 후 한 번도 투자적격등급인 ‘BBB’급을 받아본 적도 없다. 2010년 이후로는 연결기준 당기순이익을 기록한 적도 없으며 부채비율은 내내 1000% 이상이었다.
한 크레디트 애널리스트는 “동양그룹을 분석하지 않은지 오래” 라고까지 말했다.
채권시장의 ‘큰손’으로 불리는 기관마저도 동양을 외면한 지 오래다. 국민연금의 경우 현재 위탁운용사를 통해 동양 그룹과 분리를 앞둔 동양생명의 주식 일부만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기관투자자는 대부분 ‘A’ 등급 이하 회사채에는 투자를 하지 못하도록 엄격한 내부규정을 두고 있어 동양 그룹과 계열사에 대한 투자 자체가 불가능했다.
결국 동양은 자금을 만들기 위해 고금리를 내세워 일반 투자자를 공략했다. 2~3%대 저금리 시대에 8~9%에 이르는 금리와 동양이라는 브랜드, 개인에게는 낯선 신용등급이 결국 일반 투자자의 지갑을 열게 만들었다.
하이일드 채권 시장 죽인 동양
동양증권이 계열사의 회사채와 CP에 대한 위험을 투자자에게 정확히 고지하고 팔았는지는 금융감독원의 조사와 법원의 판결 등을 통해 결론이 날 전망이다.
그러나 불완전 판매 여부의 판가름에 앞서 동양그룹 사태가 자본시장에 큰 피해를 끼쳤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바로 ‘하이일드(High Yield)’ 투자 시장이 성장할 수 있는 길목을 막아버렸다는 점이다.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은 대개 높은 금리를 내세우기 때문에 고수익을 거둘 수 있지만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에 투자하는 만큼 원금 손실 등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해외에서 하이일드채권은 일정 규모를 갖추고 수익을 내는 중요한 투자수단 중 하나로 손꼽힌다. 투자자 중에는 저위험·저수익 구조의 안정적인 투자 상품을 선호하는 부류와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높은 수익을 원하는 부류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양 사태 후 국내에서 하이일드 투자라는 말 자체가 사라질 위기다. 일반 투자자들 사이에서 BB급 이하 기업은 마치 ‘곧 망할 기업’처럼 인식되고 있고 정치권에서는 개인이 CP를 아예 구매하지 못하게 하자는 황당한 얘기까지 나온다. 이뿐 아니라 회사채 시장에서는 A급 회사채까지 외면을 받고 있다. 동양 사태 이후 BBB급 이하 기업 중 회사채를 발행한 곳은 동부제철이 유일했다. 회사채를 다시 발행하는 ‘차환’으로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데 회사채나 CP를 사줄 곳이 없으니 만기가 돌아온 회사채나 CP를 ‘울며 겨자먹기’로 현금으로 갚는 ‘상환’을 하는 곳도 늘어났다.
하이일드의 필요성
하이일드 채권은 투자의 측면에서나 기업의 자금조달 측면에서 꼭 필요한 수단이다. 투자자의 입장에서는 위험을 감수하고 높은 수익을 낼 수 있는 중요한 투자상품이 된다. 펀드평가사 제로인에 따르면 최근 1년 글로벌하이일드 채권의 수익률은 7.2%에 달했다. 반면 국내 하이일드 채권 수익률은 집계조차 어렵다. 3분기부터 하이일드 펀드 자체가 제대로 운용조차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내에서는 제대로 된 하이일드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이일드 투자상품의 기본이 되는 BB급 이하 기업들이 발행하는 회사채를 찾아보기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이데일리 본드웹에 따르면 현재 유통되는 BB급 이하 채권은 30~40개에 불과하다. 이를 바탕으로 펀드를 구성하거나 투자시장이 형성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동양 사태로 5만명에 이르는 투자자들이 손해를 입었음에도 시장 관계자들은 국내 하이일드 시장의 규모를 키워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의 생각 역시 같다. 지난해 웅진그룹과 STX그룹의 법정관리 사태로 회사채 시장이 얼어붙고 우량 기업에만 돈이 몰리는 양극화 현상이 지속되자 정부는 ‘회사채 차환지원’ 계획까지 발표했다. BBB급 이하 비우량 기업들도 회사채를 발행할 수 있도록 신용보증기금 등이 보증을 해준다는 것이다.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의 지원도 이어지고 있다.
‘적정 신용평가’ 시스템 갖춰야
시장에서는 하이일드 투자 시장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국내 신용평가사들의 신용등급 ‘인플레이션’을 손꼽는다.
재무구조와 부도 위험 등을 고려했을 때 하이일드 투자의 대상이 되는 BB급 기업들의 실제 등급이 사실은 그보다 더 낮아야 한다는 얘기다. 신용등급 ‘BBB~A’급인 기업들이 사실은 하이일드 투자 대상이라는 분석까지 나온다.
실제로 신용등급별 부도율을 비교하면 이 같은 얘기에 힘이 실린다. 블랙록 자산운용사에 따르면 미국의 하이일드 채권 시장의 부도율, 즉 BB급 이하 투기등급 기업의 부도율은 평균 1.09% 수준이다. 그러나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국내 BB급 이하 기업들의 부도율은 지난해 기준 16.2%로 나타났다. 미국의 16배 수준이다. BBB급 기업들의 부도율이 1.6%로, 숫자로만 보면 국내 BBB급 기업들의 부도율이 미국의 BB급 이하 기업들의 부도율과 비슷하다.
하이일드 투자 대상인 BB급 기업들의 부도율이 16%가 넘다 보니 동양과 같은 사태가 발생할 확률도 커진다. 한 크레디트 애널리스트는 “부도율이 10%가 넘는 수준의 기업들의 채권을 하이일드 채권이라고 할 수 없다”며 “이들의 회사채나 CP를 샀다가 손실을 볼 확률도 미국의 10배가 넘는다는 얘기”라고 지적했다.
국내 신용평가사들의 등급 인플레이션은 오래 전부터 지적됐던 문제다. 국내에서는 ‘AAA’ 등급을 받는 포스코의 국제신용등급은 ‘BBB-’다. 국내에서는 초우량등급 기업이지만 해외에서는 한 단계만 더 신용등급이 떨어져도 투기등급 기업이 될 상황이다. 이처럼 대부분 기업들의 국내 신용등급과 해외 신용등급이 적게는 3~4단계 많게는 8~9단계까지 차이가 난다. 물론 신용평가사들이 국제 신용등급에 따라 국내 기업들의 신용등급을 모두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적정한 신용등급을 부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은 필요하다. 시장 참여자들은 독자신용등급을 도입하거나 신용평가사가 수익구조를 다양화해 기업의 눈치를 보지 않는 환경조성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만약 동양에 대한 신용등급 조정이 좀 더 빨랐다면 동양은 신용등급 하락으로 회사채나 CP를 추가로 발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만큼 피해자도 줄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제대로 된 하이일드 투자 시장도 적정한 신용평가를 바탕으로 해야만 성장할 수 있다.
[이 기사는 이데일리가 제작한 ‘18th SRE’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18th SRE는 2013년 11월13일자로 발간됐습니다. 책자가 필요하신 분은 문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문의 : 02-3772-0161, mint@e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