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면의 사람이야기]품격있는 대한민국을 위한 조언

  • 등록 2019-05-30 오전 5:00:00

    수정 2019-05-30 오전 5:00:00

[이근면 초대 인사혁신처장·강원대 초빙교수]얼마 전 호주 여행에서 있었던 일이다. 가이드가 한국의 높아진 위상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전쟁통에 태어나 고도성장기에 치열하게 사회생활을 했던 베이비부머에게 한국은 이제 좀 먹고살만해진 나라 정도였는데, 삼성이 만든 스마트폰으로 방탄소년단(BTS)의 영상을 보는 호주의 젊은이들에게는 흥미로운 나라인 것이다. 한
류를 만든 기술과 문화의 선도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제 진정한 선진국 반열에 들어갔다 싶어 한껏 자부심에 취해 있던 차에 가이드의 이어진 말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한류에 힘입어 호주에도 한국 방송이 송출되는데 그 내용이 너무 낯 뜨겁다는 것. 관찰예능이라는 이름을 달고 서른도 안 된 연예인이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수십억짜리 주택에서 호화생활을 누리는 모습을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보여주기 민망하다는 가이드의 통탄에 생각이 깊어졌다.

위상 높아진 한국…정신적 자산은 빈약

드라마 속의 기업인은 철학 없는 천박한 졸부로 그려지기 일쑤고 정치인들은 대의명분보다는 권모술수를 앞세운 모리배로 묘사되고 있다. 가족 간에도 화합과 사랑보다는 다툼과 반목이 일상화되어 있지 않은가. ‘막장 드라마’가 하나의 장르가 될 만큼 한국의 방송은 자극적인 소재를 저렴하게 풀어내는데 익숙해져 있다.

이런 현상은 사회가 공유하는 가치관의 문제이고 곧 교육의 문제다. 경제력과 국방력, 외교력 등 외형은 급격히 커졌지만 그 안을 채울 정신적 자산은 여전히 빈약함을 반영하는 것이다. 단순히 시대상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씁쓸한 뒷맛을 느끼게 한다.

우리나라는 내수시장이 협소해 바깥을 지향해야 생존할 수 있는 운명을 안고 있다. 우리의 제품과 문화를 아시아를 넘어 세계 곳곳에 수출할 만큼 몸집은 커졌는데 머리가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다. 이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우리만의 가치를 살리되 울타리 안에 머물지 않고 밖으로 나아가 세계 속에 인정받는 가치를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만들어 가는 가치가 세계인과 700만 동포에게는 어떻게 보일지, 나아가 교민사회가 해당 국가에서 어떻게 인식될지도 고민할 때가 되었다. 성장과 경쟁이 우리에게 생존을 담보 한다면 결과만을 따지거나 돈에만 매몰되어 경주마처럼 달리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정신적 성장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질서 엄격한 일본·다문화 수용 프랑스···한국은?

우리가 선진국이라 부르는 나라들은 정신적 자산이 풍부하다. 일본의 아이들은 엄격한 질서의식을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배운다. 프랑스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며 독일은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 위에 국제사회에서의 책임을 다하려는 인식이 국민들에게 배어 있다. 호주, 캐나다 같은 나라들은 지구적 차원의 환경보호와 지속가능한 발전을 고민하며 이러한 가치를 국내외 정책에 적극 반영하고 있다.

미국사회가 성조기 앞에서 모두 하나의 미국 시민이라는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데 애국심을 세련되게 풀어내는 할리우드의 수많은 상업영화들이 엄청난 공헌을 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영국 국민들이 정부의 발표보다 BBC의 보도를 더욱 신뢰할 수 있었던 데는 엄격한 중립과 사실전달을 강조한 경영진과 PD, 기자들의 노력이 있었다. BBC는 국민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표현의 자유, 민주주의의 증진에 기여했고 나아가 영국사회를 통합하는 아교가 된 것이다.

우리의 학교교육은 이미 빈사상태다. 스승의 날을 없애달라는 요청이 나올 만큼 사제지간의 신뢰는 추락했고 학생인권만 있고 교사인권은 없다는 탄식이 도처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사회 구성원으로써 갖춰야 할 의무인 인성보다 권리인 인권을 먼저 가르치는 교육. 가치교육은커녕 입시와 취업교육 수준도 빈약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사회교육의 중요한 축인 방송조차 제 역할을 해주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갈등을 조장하는 메시지를 내보내고 있으니 우리사회가 갈등지향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떤 나라를 꿈꾸고 국제사회에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시대적 소명을 감당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우리끼리의 다툼과 도토리 키 재기 식 경쟁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대한민국의 상(像), 어디로…문화 대혁신 나설 때

대화 말미에 가이드가 신선한 조언을 했다. 여행지에서 팁으로 1달러를 주지 말고 1000원짜리를 건네면 교민사회도 돕고 한국의 위상도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3000만명에 이르는 여행객들이 1000원짜리 한 장씩 두고 오면 여행 1일당 300억원이 현지에 풀리게 되고 이것이 교민경제에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취지다. 개개인이 팁으로 교민사회를 돕고 한국을 알리는 방법도 있는데 국가와 사회는 무엇으로 세계 속의 한국상(像)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지 돌아볼 때다.

이를 위해선 질서, 가치, 기본적 윤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교육할 수 있는 시스템을 학교와 사회에 구축해야 한다. 출판, 방송, 영화 등의 매체를 통해 세계에 내놓을 만한 문화와 가치를 선양하고 재발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부정부패, 관피아(관료+마피아), 가정불화, 갈등과 배신이 아닌 청백리, 두레, 성군과 충신, 애국과 애족, 대가족과 내리사랑, 밥상머리교육 등 발굴 계승해 나갈 한국적 ‘좋은 가치’는 너무나도 많다.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고 국가적 지향가치도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매력 있는 한류가치’를 재탄생시켜야 할 시점이다. ‘세계 속의 한국, 글로벌 코리아’ 같은 구호가 실질적인 힘을 가지려면 우리의 가치를 오늘에 맞게 재해석해야 하고 이는 가정과 더불어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의 회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문화에도 품격이 있다. 이제 대한민국을 위하여 ‘문화 대혁신’을 시작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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