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기 제명, 이태현 참패..뒤집어진 씨름판

프로팀 1개 남고 스타들 모래판 떠나
씨름연맹·동우회 내분 겹쳐 만신창이
  • 등록 2006-09-12 오전 7:34:49

    수정 2006-09-12 오전 8:36:25

[조선일보 제공] ‘씨름판의 신사’ 이준희(李俊熙), ‘모래판의 풍운아’ 강호동(姜鎬童), ‘인간 기중기’ 이봉걸(李鳳杰), ‘뒤집기의 달인’ 이승삼, ‘인간 골리앗’ 최홍만…. 1983년 4월 출범해 프로야구를 능가하는 국민적 인기를 모은 민속씨름이 낳은 스타들이다.

그런데 24년이 지난 지금 태권도와 함께 국기(國技)로 꼽히는 씨름이 천덕꾸러기로 변하고 있다. 팀은 사라지고, 스타들은 떠나고, 팬들의 관심은 사라지는 속에서 치열한 내부 분열마저 일어나고 있다.

민속(프로)씨름 1세대 최고 스타로 체중 140㎏이 넘는 거구들을 마치 배추밭에서 무 뽑듯 번쩍번쩍 들어올리던 영원한 천하장사 이만기(李萬基) 인제대 교수는 최근 자신의 고향이라 할 한국씨름연맹에서 영구 제명됐다. 이 교수가 연맹과 김재기(金在基) 총재를 비방하고 다녔다는 등의 혐의다.

그런가 하면 지난 10일에는 신세대 씨름 스타로 군림하다 이종(異種)격투기인 프라이드로 진출한 이태현이 얼굴이 벌겋게 변한 채 기권패당하는 등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민속씨름 최중량급(最重量級)인 백두장사를 18회나 제패한 이태현의 참담한 모습은 한마디로 만신창이가 된 민속씨름의 현재 모습을 보여준다는 게 많은 팬들의 지적이다.

지금도 40대 이상 팬들의 아련한 향수를 자극하는 씨름의 몰락은 팀이 잇따라 해체되면서부터 시작됐다. 초창기 민속씨름단은 현대·LG 등 재벌기업이 가세하며 8개에 달했으나 IMF 외환위기 이후 줄줄이 해단되기 시작, 지금은 현대삼호중공업 1개만 남았다.

씨름단이 없어진 것은 표면적으로는 ‘비용 절감’이라는 경제적인 것이었지만 기업 내부적으로는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어가면서도 프로야구나 프로축구에 비해 홍보효과가 훨씬 떨어진다’는 판단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민속씨름이 사양길에 접어든 게 IMF 외환위기 때문만은 아니다. 씨름 팬들 사이에 제기되는 “초창기 인기가 있었을 때 씨름 전용 체육관을 짓거나 일본 스모처럼 도장화(道場化)를 이뤄 청소년들이 계속해서 대(代)를 잇게 하던가, 아니면 활발하게 해외에 진출하기라도 해야 했는데 인기에 안주해 기회를 놓쳤다”는 지적이 상당 부분 일리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민속씨름은 호황기 때 전문경영인 영입이냐, 씨름인 출신이 행정을 맡아야 하느냐를 놓고 오랜 기간 샅바 싸움을 해왔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예산이 방만하게 사용됐으며 최근에는 씨름을 중계하던 KBS마저 등을 돌리기도 했다.

KBS의 중계 포기는 한때 10억원을 넘던 중계료 수입을 끊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민속씨름의 숨통을 더욱 조이게 됐다. 팬들의 관심이 높았을 때는 이런 문제들이 묻혔지만 팀 해체는 자연스럽게 스타들이 떠나는 결과를 낳았고 악순환은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민속씨름은 인기가 떨어지자 이를 만회한다며 복식(服飾)을 바꾸는 등 안간힘을 썼지만 외부의 반응은 ‘국적 불명’이라는 싸늘한 것이다. 같은 기간 일본의 스모가 철저한 팬 관리, 치밀한 고증으로 올드팬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지금도 팬을 끌어 모으는 것과 대조적이다. 일본 스모가 외국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한 반면, 씨름이 순혈주의(純血主義)를 고집한 것도 다양하게 제기되는 비판 중 하나다.

실제로 천하장사 출신 최홍만이 씨름선수 가운데 제일 먼저 최근 폭발적 인기를 모으고 있는 K1으로 진출하려 했을 때 많은 씨름 선·후배들이 말렸지만 “나도 팬들의 환호성 속에서 경기하고 싶다”는 그의 말 한마디에 대꾸하는 사람은 없었다.

현재 특단의 대책이 없는 한 회복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민속씨름은 이 인제대 교수의 영구 제명 이후 본격적인 내전 국면에 돌입할 전망이다. 이 교수가 회장을 맡고 있는 민속씨름동우회가 “이 교수에 대한 징계가 철회되지 않으면 장사 타이틀을 반납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민속씨름동우회는 11일 기자회견을 갖고 “지난 4일 한국씨름연맹이 내린 이 교수에 대한 영구 제명 징계를 철회하지 않으면 회원들이 갖고 있는 장사 타이틀을 자진 반납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이만기씨 외에 임용제, 이승삼, 손상주 등 80년대 모래판을 주름잡았던 장사들과 이 교수를 키웠던 황경수(黃慶守) 전 현대 감독, 차경만 전 LG 감독 등이 참석했다. 바야흐로 국민들의 관심과는 동떨어진 모래판 대전(大戰)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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