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위시한 유엔군의 개입으로 ‘남조선해방’에 실패한 북한은 미군철수를 남조선해방의 전제조건으로 인식하고 적화통일의 ‘중심고리’(관건)로 미군철수를 주장해왔다. 그러나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주한미군이 북한의 남침을 억제하지만 남한의 북침도 억제할 수 있다고 보는 ‘이중억제, 이중봉쇄’ 논리를 펴기도 했다.
정전과 함께 냉전이 진행되고 휴전선이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치열한 대치점이 됨으로써 한미동맹은 공산세력의 남진을 막는 반공의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불안정한 정전체제에서 한국이 오늘과 같은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군사안보적 지원과 경제적 유무상 원조의 도움이 컸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한국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이룬 모범적인 성공사례로, 제3세계 개발도상국 중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한 유일한 나라이다.
한때 한국은 전략적 모호성을 내세우고 균형적 실용외교를 펼치면서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안미경중(安美經中)’의 실리를 챙겼지만, 이제는 전략적 명확성을 내세우고 규범기반질서에 편승하려고 한다. 윤석열 정부는 대한민국이 ‘글로벌 중추국가’로서 경제적 실리를 다소 희생하더라도 가치연대를 통한 ‘공동안보’를 강화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미·중 전략경쟁에서 미국편에 설 수밖에 없다며 양자택일의 흑백논리를 펴는 것과, 상대를 부정하는 데서 자기 정체성을 찾는 ‘독선적 정의관’은 정전체제에서 산생된 인식구조로 볼 수 있다. 정전이 장기화하면서 우리들의 인식구조에 적우(敵友)의 흑백논리가 독선적 정의관으로 자리 잡고 있어 쉽게 타협할 수 없다. 이러한 인식구조는 남남갈등과 정쟁의 근원이 되고 있다.
2007년 10·4선언에서 3자 또는 4자 종전선언을 추진하기로 할 때만 해도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전환에 대한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지금은 북한이 ‘사실상 핵보유국’이 됐고 한미가 확장억제력 실행력 강화로 공포의 균형을 이루고 있어 종전선언 추진 등 현상변경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태의 현상유지는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기정사실화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