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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다 총리가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의 뒤를 이은 지 두 달째인 지난 4일, 미쿠리야 다카시 도쿄대 명예교수는 일본 주간지 슈칸분슌에 기시다 총리를 향해 혹평을 쏟아냈다. 그는 “듣는 힘이 장점이라더니 기자회견을 몇 번을 봐도 (기시다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뭔지 모르겠다”고 일갈했다. 미쿠리야 교수는 기시다 총리가 주장하는 ‘새로운 자본주의’라든지,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에 대한 설명도 모호하다고 덧붙였다.
기시다 총리는 자민당 명문 파벌인 고치카이의 수장이다. 자민당 내부에서도 자유주의 비둘기파로 꼽히며,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정파다. 역대 일본 총리 4명을 배출한 명문 정파를 이끌어온 만큼 기시다 총리의 철학 총론은 인정한다는 분위기이다. 문제는 각론이다. 미쿠리야 교수는 “아베라면 자기 의사를 분명히 했을 텐데 기시다에는 그게 없다”며 기시다 총리가 지난 10년간의 총리와는 확연히 다르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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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기시다 총리는 낙천적이고 태평하며 무관심하다는 평가를 받는데, 그래서일까. 그가 쓴 왕관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는 평가마저 나올 정도다. 버락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은 취임한 지 44일 만에 흰머리가 부쩍 늘어난 모습으로 주목받은 바 있지만 기시다 총리는 총리가 된 이후에도 활력이 넘치고 스트레스도 안 받는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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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사회의 시선에선 여전히 미국과 일본은 한 몸처럼 움직이는 듯 하다. 일본은 미국이 주도한 석유 비축유 방출에 혈맹인 영국보다 더 적극적이었으며, 마찬가지로 베이징 동계올림픽 보이콧 여부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도 미 정부의 입만 애타게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일본 내부에서는 미국과 중국 어느 한 쪽의 심기라도 거스르지 않으려는 ‘양다리 외교’를 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기시다 총리가 외무상에 친중파인 하야시 요시마사를 임명한 데다 미국이 주도한 베이징 올림픽 보이콧 여부에 대해 기시다 총리가 “일본은 일본의 입장에서 생각하겠다”고 밝힌 것을 문제삼으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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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기시다 총리의 무색무취 리더십이야말로 일본 사회에 적합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작년 코로나19로 숨진 일본 코미디언 시무라 켄의 코미디쇼인 ‘바보 영주’가 힌트가 될 수 있다. 바보 영주는 하인들을 골탕먹이고 시녀들을 희롱하는 것이 삶의 낙이지만 아픈 부하들을 직접 챙기는 등 딱히 심각한 악의는 없는 인물이다. 모자라지만 나쁘지는 않은 영주로 부하들로부터 신임받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 코미디쇼는 1986년부터 후지 TV에서 방영되다 작년 주연을 맡은 시무라 켄이 숨지면서 막을 내렸다.
일본 주간지 겐다이 비즈니스는 “바보 영주가 일본인에게 환영받는 건 어떤 의미에선 일본인의 이상적인 리더상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는 일본형 경영의 중요한 요소로 꼽히는 ‘오미코시(おみこし) 경영’과도 결이 같다. 축제 때 신을 태우는 가마를 일컬어 오미코시라고 하는데, 여러 사람이 짊어지고 옮기는 만큼 상사의 리더십이 딱히 필요하지 않은 경영 형태다. 즉, 일본에선 상사가 실무를 책임지지 않고 우수한 부하가 사업을 총괄하는 방식을 이상적이라고 본다. 멍청하고 게으른 ‘멍게’ 상사가 멍청하고 부지런한 ‘멍부’보다 낫다는 한국의 우스갯소리와도 비슷하다.
리더십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기시다 총리 역시 개인보다는 조직 위주로 고치카이파다운 정치를 한다는 평가다. 고치카이는 정책 파벌이라고 불릴 정도로 정책에 강한 정치인들이 많은 파벌이기 때문에 정책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편이라고 한다. 기시다 총리 개인의 리더십과 별개로 결국 중요한 건 현장의 관료들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