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특의 뉴욕 다이어리)바토리의 후예들

  • 등록 2009-11-23 오전 10:00:00

    수정 2009-11-23 오후 1:08:42

[뉴욕=이데일리 피용익특파원] 16세기 후반 헝가리 왕국에는 에르제베트 바토리(Bathory)라는 백작부인이 살았습니다. 명문 바토리 가문의 후손인 그녀는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처녀를 살해한 후 그 피로 목욕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녀에게 희생당한 처녀의 수는 6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 끔찍한 실화는 타인의 피를 빨아들여 젊음을 유지하는 흡혈귀, 즉 뱀파이어 신화의 원형이 됐습니다. 그리고 신화는 진화를 거듭해 각종 문학과 영화로 재생산됐지요. 그 중에서도 현재 가장 인기가 많은 작품은 `트와일라잇(Twilight)` 시리즈가 아닐까 싶습니다.

▲ 영화 `뉴 문`의 주연배우인 로버트 패틴슨의 얼굴이 그려진 여성용 팬티
최근 영화 트와일라잇의 속편인 `뉴 문(New Moon)`의 개봉을 맞아 뉴욕이, 아니 미국이 들썩이고 있습니다. `해리 포터`는 저리 가라할 정도입니다.

보더스나 반스앤노블과 같은 대형 서점은 벌써 1년 전부터 트와일라잇 특별 코너를 마련해 놓고 원작 소설 세트와 영화 DVD, 주인공 캐릭터 상품 등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음반 가게에서는 영화가 개봉되기 전부터 사운드트랙 음반이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신문 가판대에는 주인공들이 표지에 등장한 각종 잡지들이 진열돼 있습니다. 방송사들은 앞다퉈 주인공들을 섭외하고, 주인공이 안되면 조연이라도 출연시킵니다.

각종 미디어에는 남녀 주연배우인 로버트 패틴슨과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열애설이나 결별설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트와일라잇 신드롬이라는 표현이 적당해 보입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인기있는 이유는 스티프니 메이어의 원작 소설이 탄탄해서만은 아닙니다. 뱀파이어인 에드워드 컬렌 역을 맡은 주연배우 로버트 패틴슨에 대한 여성 팬들의 사랑이 큰 몫을 하고 있지요.

흥미로운 점은 1986년생인 패틴슨에 열광하는 것은 10대 소녀들 뿐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른바 `트와일라잇 엄마들(Twilight Moms)`로 불리는 중년 아줌마 팬들의 열기 역시 뜨겁습니다.

미국 사회에서도 최근까지 아줌마들은 팬덤 현상의 변방에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배우가 있어도 남편과 아이들의 눈치를 보느라 드러내질 못했습니다. 그러나 트와일라잇을 통해, 보다 엄밀히 말하면 패틴슨을 통해 이들은 서서히 중심부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겨울연가`의 배용준이 일본 아줌마들을 집 밖으로 나오게 한 것처럼 말이지요.

트와일라잇을 주제로 개설된 아줌마 전용 블로그에 접속해 봤습니다. 한 여성은 패틴슨에 대한 성적인 환상을 글로 풀어놓고, 어떤 여성은 아들 뻘인 패티슨을 흠모하는 자신의 감정에 죄책감을 느낀다고 적습니다. 또 다른 여성은 화목한 가정을 유지하는 한 패틴슨을 흠모하는 것이 죄는 아니라며 위로합니다.

한 사이트에는 이같은 트와일라잇 엄마들을 겨냥한 각종 상품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습니다. 가장 인기 있는 상품 가운데 하나는 패틴슨의 얼굴이 그려진 팬티라고 합니다.

소설과 영화에서 에드워드 컬렌은 인간 여자친구인 벨라 스완을 사랑하면서도 그녀의 피에 목말라하며 고뇌합니다. 피는 에드워드가 100년 넘게 살면서 젊음을 유지하는 원천입니다. 블로그에 적힌 솔직한 글들을 읽으며 아줌마들의 패틴슨 열광의 이면에도 젊음에 대한 갈망이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중년 여성들은 패틴슨을 통해 젊음을 되찾은 기분이라고 말합니다. 첫사랑의 두근거림을 다시 느끼게 됐고, 예전과 달리 성적인 욕망도 타오르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젊음에 대한 갈망은 400여년 전 바토리 부인이나 오늘날의 트와일라잇 엄마들이나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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