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재’에는 민족의 역사와 뿌리가 담겨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도 있듯이 수천, 수백년을 이어져 내려온 문화재는 우리 후손들이 잘 가꾸고 보존해 나가야 할 소중한 유산이죠. 문화재는 어렵고 고루한 것이 아닙니다. 문화재에 얽힌 재밌는 이야기, 쉽고 친근하게 배울 수 있는 문화재 이야기를 전합니다.<편집자주>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서울의 사대문 안에는 5개의 궁이 모여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관람객들이 방문하고 있는 경복궁, 덕수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이죠. 우리는 이 궁궐을 ‘조선 5대궁’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왜 조선의 궁궐은 한개도 아니고 두개도 아닌 다섯 개나 있을까요? 사대문 안에 5개의 궁이 모여있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사례입니다. 오늘은 조선의 궁이 5개가 된 이유를 살펴보려 합니다.
| 경복궁 근정전(사진=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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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궁이 지어진 순서를 살펴보겠습니다. 순서대로 나열해보자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순입니다. 경복궁은 조선 개국과 함께 제일 먼저 지어진 궁궐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관람객들이 찾고 있는 대표적인 궁이죠. 갑작스럽게 결정된 한양 천도로 태조 이성계를 비롯한 왕족과 관료들은 잠시 머물 수 있는 임시궁궐이 필요했어요. 이때 정도전의 지휘 아래 세워진 궁궐이 경복궁입니다.
이후 두 번의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수도도 두 번이 바뀝니다. 개성으로 갔다가 다시 한양으로 수도가 옮겨졌어요. 1398년(태조 7) 8월에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을 방원(태종)의 난 또는 정도전의 난이라고 불러요. 1400년(정종 2) 1월에 일어난 제2차 왕자의 난은 방간의 난 또는 박포의 난이라고 하죠. 태종 이방원은 친족끼리 피를 보았던 장소라는 이유로 경복궁으로 들어가지 않았어요. 이때 새로 지은 궁궐이 바로 창덕궁입니다.
이어 즉위한 세종은 상왕 태종을 모시기 위해 창덕궁 바로 옆에 수강궁을 지었어요. 그러다 성종이 수강궁을 중건하면서 지금의 이름인 ‘창경궁’으로 바꿔 불렀습니다. 경복궁은 타국의 외교 사절단을 맞을 때와 국가 의례를 행할 때만 쓰였죠.
창경궁은 다른 궁궐에 비해 많은 탄생 비화가 전해지는 곳이에요. 임진왜란으로 인해 경복궁과 함께 불에 타버렸고, 인조 2년에 발생한 ‘이괄의 난’에서는 또 한번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죠. 1907년 순종이 즉위하면서부터는 더 큰 아픔을 겪게 되는데요. 일제에 의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창경궁을 훼손하고 그 곳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지었기 때문이죠. 다행히 1980년대에 이르러 기존의 놀이공원 시설이 모두 철거되면서 창경원은 본래의 ‘창경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 살구꽃 만개한 덕수궁 석어당(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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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을 겪으며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은 모두 폐허가 돼버렸습니다. 궁궐을 복원하는 동안 선조가 묵을 곳이 필요했죠. 당시 선조가 지내던 궁궐은 경운궁입니다. 바로 지금의 덕수궁이죠.
광해군 때 이르러 창덕궁이 복원됐지만, 창덕궁에 얽힌 과거의 일들은 광해군의 마음을 어지럽혔어요.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난 장소였고, 계유정난 이후 단종이 세조에게 쫓겨난 곳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광해군은 자신이 머물기 위한 궁궐을 새로 짓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다섯 번째 궁궐이 바로 경희궁입니다. 하지만 정작 완공의 당사자인 광해군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경희궁에 입궁하지 못한 채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돼요.
결국 왕권과 권력 다툼의 역사로 인해 서울에는 다섯 개의 궁이 생겨났어요. 여러차례 복원을 거친 ‘조선 5대궁’은 현재도 많은 국내외 관람객이 방문하고 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명소이기도 하죠. 요즘같이 날씨가 좋은 봄날, 가족들과 함께 5대궁이 생긴 역사를 생각하며 궁궐로 나들이를 다녀오는 것은 어떨까요.
| 서울 종로구 창덕궁 낙선재를 찾은 관람객들이 봄나들이를 즐기고 있다(사진=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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