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비 올 때 우산 뺏은` 은행들

  • 등록 2012-09-18 오전 6:00:00

    수정 2012-09-18 오전 6:00:00

[뉴욕= 이데일리 이정훈 특파원] “요새 몇몇 대형 은행들을 제외하곤 모기지대출 잘 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상 최저라고 하니 앞으로 금리가 뛸 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걱정 때문이죠. 대부분 은행들이 모기지를 까다롭게 보니 대형 은행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금리를 받고도 배짱 장사를 할 수 있는 겁니다.”

미국인들과 재미동포들을 상대로 영업하는 국내 시중은행 계열인 한 은행 고위임원은 ‘사상 최저금리에 왜 모기지가 많이 늘어나지 않고 은행들이 적용하는 모기지금리가 고시금리에 비해 높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실제 프레디맥이 산정하는 30년만기 모기지 금리는 3.6~3.7%로 최저수준을 맴돌고 있는데 대형 은행들을 찾아가보면 통상 4% 언저리의 금리를 요구하고 있다.

재선을 앞두고 버락 오바마 정부는 모기지를 활성화할 수 있는 온갖 대책을 내놓고 있고 연방준비제도(Fed)도 천문학적인 달러를 풀어 모기지 금리를 낮추고 있지만 은행들이 돈 줄을 느슨하게 풀지 않는 한 실효성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런 사정을 아는 미국인들은 이제 스스로 모기지 받기를 포기하고 은행을 찾지도 않는 형편이다.

이 때문에 기존 모기지를 금리가 낮은 상품으로 갈아타기에 최적의 환경인데도 모기지은행가협회(MBA)는 올 모기지 재융자(리파이낸싱) 신청액이 1조달러에 못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작년의 8580억달러보다는 높지만 2010년의 1조1000억달러보다는 적은 규모다.

고객 신용도는 제대로 평가하지 않은채 마구잡이식으로 모기지대출을 빌려주다 부동산 경기가 어려워지자 제대로 된 절차도 거치지 않고 ‘로보 사이닝(Robo-signing)’이라는 불법 주택압류를 일삼던 은행의 과거 행태를 감안하면 그럴 만하다 싶다.

이 뿐만이 아니다. 본업 중 하나인 자금을 빌려주는 일을 소홀히 하고 있는 은행들은 이렇게 경기가 좋지 않은 때에 오히려 예금을 맡기거나 계좌를 만드는 고객들에게 더 많은 수수료를 챙기기에도 혈안이 돼 있다. 예금에 이자를 주기는 커녕 직불카드나 개인수표 사용 등에 각종 수수료를 신설해 손쉬운 이득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은행들의 형태가 단기적으로는 수지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멀리 내다보면 자신들의 고객 신뢰와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주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FDIC)가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에서 은행을 이용하지 않는 가구가 1200만가구로 미국 전체에서 무려 8.2%나 됐다. 은행에 계좌가 있으면서도 은행 시스템을 거의 이용하지 않는 가구도 2400만가구에 이른다. 이를 합치면 미국 전체 가구중 28%나 된다.

은행을 이용하지 않는 가구는 대부분 저소득층이었다. 가진 돈이 거의 없다보니 예금할 이유가 없다. 은행들도 계좌를 유지하기 위해 일정 금액 이상을 요구하거나 신용카드 발행을 까다롭게 하면서 이들을 외면하고 있다. 반대로 은행을 잘 이용하지 않는 가구는 수수료 부담 등으로 현금거래를 주로 하거나 비은행 금융기관의 직불카드나 선불카드를 쓰고 있다고 한다.

이쯤 되면 미국인들의 은행 외면은 경기에 따른 일시적 모습으로만 보긴 어려울 듯하다. 지난해를 뜨겁게 달궜던 월가 점령시위나 은행계좌 폐쇄운동 등도 이같은 은행권 행태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사회적 현상으로 구체화된 것이니 말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비 올 때 우산을 뺏지말라`는 금융위원장 발언이 은행권의 행동 변화로 이어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시혜적, 온정적 접근이 아닌 미국 은행권 실패를 교훈으로 삼는 보다 적극적인 접근을 기대해 본다.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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