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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이용성 기자] 직장인 이모(29)씨는 ‘만원의 행복’(하루에 1만원 아래로 소비하는 것)으로 하루를 버틴다. ‘월급 빼고 다 오르는 상황’에서 택한 고육지책이다. 이씨는 원래 아침을 먹지 않고 회사 근처 프랜차이즈 커피를 사 들고 출근했지만, 이제는 회사 탕비실에 있는 커피를 타 마신다. 전에는 주저 없이 ‘혼밥’을 했지만, 이제는 회사 사람들과 법인카드로 해결한다. 교통비도 ‘다이어트’ 중이다. 퇴근길은 시간 여유가 있기 때문에 5000원이면 살 수 있는 ‘30일 정기권’을 끊고 서울 자전거 따릉이를 타고 다닌다. 저녁은 3000~5000원 수준의 편의점 도시락으로 해결한다. 술자리도 꼭 필요한 모임만 참석한다. 이씨는 “전에는 하루에 커피 값만 1만원 정도 썼는데 요새는 이렇게 살다 보니 하루 동안 1만원도 채 안 쓰고 있다”고 전했다.
‘역대급 고물가’…MZ세대들 ‘짠테크’족 자처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7월 소비자물가지수는 1년 전보다 6.3%로 상승했다. 이는 외환위기 때인 1998년 11월(6.8%) 이후 최대 상승 폭이다. 외식물가 상승률(8.4%)과 외식 외 개인 서비스(4.3%) 도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다.
살벌하게 오른 물가에 MZ 직장인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런치플레이션(점심+인플레이션)과 교통비, 식비 등에 일정 기간 지출을 아예 하지 않는 ‘무지출 챌린지’ 등 신조어의 탄생이 이를 방증한다. 고물가 시대의 단면으로 젊은 층들의 소비문화가 달라지고 있다.
고물가에 ‘짠테크’(짜다+재테크의 합성어로 불필요한 지출을 막는 소비 패턴)를 택한 MZ세대들의 최대 걸림돌은 식비다. 지난 5월 HR테크 기업 인크루트가 직장인 100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직장인 10명 중 9명(95.5%)이 점심값에 부담을 느낀다고 답했다. 응답한 이들은 식비 절약을 위해 ‘직접 도시락 싸오기(41.1%)’와 ‘저렴한 음식 메뉴를 선택해 지출 줄이기(34.9%)’를 꼽았다.
도시락으로도 끼니를 때우는 ‘짠테크’족도 늘고 있다. 특히 이씨와 같이 요리할 형편이 되지 않는 이들에게 편의점 도시락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국내 편의점 업계 등에서는 일제히 도시락 매출이 증가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마트24가 6월 1일부터 7월 26일까지 자사 도시락 매출을 조사한 결과 전년 동기대비 48% 증가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러한 소비 문화에 발맞춰 편의점 업계에서도 각종 상품과 서비스를 내놓고 있다. 이마트24는 매월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면 한 달 동안 도시락 20개를 50%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는 ‘도시락 구독 서비스’를 내놨다. CU에서는 초가성비로 한 끼 식사를 즐기는 2000원대 초저가 도시락을 출시하기도 했다. 2년 차 직장인 A(31)씨는 “도시락으로 때워도 다양한 반찬들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며 “말 그대로 ‘도시락 전쟁’이다. 늦게 퇴근하고 편의점에 가면 인기 있는 도시락들은 이미 다 팔린 상태”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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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비 줄이는 방법도 다양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걷거나 자전거로 이동한 거리만큼 마일리지가 쌓이는 알뜰교통카드도 인기다. 여기에 카드사 추가할인 혜택을 포함하면 대중교통비를 최대 30%까지 절감할 수 있다. 집과 직장 사이 거리가 가까우면 한 달에 5000원 수준인 정기권 등을 끊고 서울시 공공자전거 ‘따릉이’를 타는 방법도 있다. ‘따릉이’ 이용률이 급증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지난 5월 ‘서울 교통이용 통계보고서’에 따르면 따릉이의 일 평균 이용건 수는 15만 건으로 전년 동월 대비 74.4% 증가했다.
‘짠테크’족들은 현재 자신의 소비 상태를 점검하고,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기도 한다. 고정 지출인 통신 요금제를 바꾸거나 안 쓰는 구독서비스를 하나둘 취소함으로써 목돈을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짠테크’를 시작한 직장인 송모(28)씨도 “안 쓰고 놔두고 있던 OTT 등 서비스를 구독 취소했고, 데이터가 남아 요금제도 저렴한 것으로 바꿨다”고 말했다. 이렇게 송씨는 한 달에 5만~10만원 고정으로 나가는 소비를 줄였다.
무엇보다 ‘생각하는 소비’가 중요하다고 ‘짠테크’족들은 설명한다. ‘짠테크’를 2개월째 이어가고 있다던 B(30)씨는 돈 쓸 수 있는 환경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고 언급한다. 그는 “외출할 때는 교통카드와 휴대 전화만 들고간다. 지나가다가 뭔가를 사 먹거나 충동구매를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무언가를 사야 할 때도 B씨는 “‘다음에 구매하자’라고 마음을 먹고 지나가면 어느 순간 구매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짠테크’ 열풍은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고 전문가는 내다봤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이데일리와 통화에서 “경제 상황에 충격을 받은 이들이 열심히 정보를 탐색하고, 소비를 최대한 줄이는 전략적인 방식을 택한 상황”이라며 “생존에 대한 불안감을 한번 경험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소비패턴이 고물가가 끝나더라도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