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시간이 앗아간 여인들의 삶, 무대서 다시 새기네

국립극단 신작 연극 '화전가'
배삼식 극작, 이성열 예술감독 연출
한국전쟁 앞둔 여성들의 삶 무대로
빗소리 등 청각적 요소 활용 인상적
  • 등록 2020-08-12 오전 6:00:00

    수정 2020-08-12 오전 6:00:00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무정한 시간이 밤의 재 흩뿌리며 / 그대의 한낮을 어둡게 물들일 때 / 시간이 앗아간 그 모든 것을, / 나 여기 다시 새기네, 그대를 위하여.”

지난 6일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한 국립극단 연극 ‘화전가’의 첫 장면. 어머니 김씨의 환갑을 맞아 서울서 돌아온 막내딸 봉아(이다혜 분)가 고모(전국향 분)에게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15번을 영어로 읽어준다. 고모는 천자문 밖에 못 배웠다면서도 조카의 시 낭독을 들으며 눈가가 촉촉해진다. “가사가 좋네. 맹 인생이 헛부고 헛부다는 말 아이래?”

국립극단 연극 ‘화전가’의 한 장면(사진=국립극단).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4월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 갑작스럽게 영시(英詩)가 등장해 당황스럽다. 그러나 눈가가 글썽글썽한 고모의 순박한 모습을 보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공연 시작부터 무대를 채우는 이 훈훈함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중간 휴식 없이 공연 시간만 140분에 달하지만 좀처럼 지루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화전가’는 배삼식 작가가 쓰고 이성열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연출을 맡은 국립극단 신작이다. 일제강점기, 남북분단, 한국전쟁 등 한국 근대사의 굴곡진 순간을 살아낸 사람들, 그 중에서도 여성들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한국전쟁이라는 굵직한 사건이 극 중심에 있지만 작품은 이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는다. 대신 전쟁에서 살짝 빗겨 서 있는 인물들을 통해 시대의 비극을 돌아본다.

김씨 가족을 비롯한 9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남편들은 독립운동으로, 또는 이념갈등으로, 아니면 건강 문제로 소식이 끊겼거나, 사라졌거나, 세상을 떠났다. 김씨의 환갑을 위해 모인 이들은 성대한 환갑잔치 대신 화전놀이를 가기로 하고 늦은 밤까지 옹기종기 모여 두런두런 수다를 이어간다. 작품은 이들의 기구한 사연을 씨줄과 날줄로 삼아 극을 이어나간다.

고즈넉한 한옥, 멀리서 들려오는 빗소리와 함께 이들의 대화는 따뜻하면서도 아련하다. 각기 다른 상실의 경험을 안고 있으면서도 서로를 보듬으며 삶을 이어가는 모습이 가슴 뭉클하다. 특히 김씨(예수정 분)가 첫째 아들 기준의 3년상을 치른 큰며느리 장림댁(이도유재 분)에게 ‘납닥생냉이’라 불리는 삼베 치마와 금가락지를 주며 친정으로 돌아가길 권하는 장면은 눈물을 감추기 힘들다. 모두가 그렇게 힘든 순간을 함께 부둥켜안고 살아왔음을 느끼게 한다.

국립극단 연극 ‘화전가’의 한 장면(사진=국립극단).
처음엔 낯설지만 듣다 보면 점점 익숙해지는 사투리, 무대 뒤편에서 실제 떨어지는 물로 표현한 빗소리 등 청각적인 요소들은 잔잔한 작품을 감각적으로 만든다. 9명의 여인들이 주고 받는 따뜻한 대화로 공연 내내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극 후반을 향해가면서 관객의 마음은 조금씩 불안해진다. 오직 관객만이 이들 앞에 비극이 펼쳐질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은 화전놀이는 물론 전쟁도 무대서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간접적으로 비극을 전달하는 연출이 더 오랜 여운을 느끼게 한다.

작품 말미에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15번이 한 번 더 등장한다. “시간이 앗아간 그 모든 것을, / 나 여기 다시 새기네, 그대를 위하여.” 봉아가 다른 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지을 때, 역사의 비극 속에 사라져간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담담한 위로가 전해진다. 공연은 오는 23일까지.

국립극단 연극 ‘화전가’의 한 장면(사진=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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