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서 갈린 해군 성폭력 유·무죄…"피해자 무시했다"

3년 4개월만에 대법원 판결, 파기환송·무죄
사건 공대위 "시대 역행한 반쪽짜리 판결" 비판
"같은 피해자 진술인데 신빙성 판단 다른 것 의문"
"군 내 성폭력 피해자 짓밟는 판결, 군 징계 촉구"
  • 등록 2022-03-31 오후 2:12:51

    수정 2022-03-31 오후 2:59:12

[이데일리 권효중 기자] 성소수자인 부하 여군 A씨를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던 해군 대령에 대해 31일 대법원이 원심의 결정을 깨고 되돌려보냈다. 다만 같은 혐의로 기소됐던 2차 가해자인 소령에 대해선 무죄 판결이 확정됐다. 이에 대해 그간 유죄 판결을 촉구해왔던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는 “피해자를 무시한 반쪽짜리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해군 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3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상고심이 끝난 뒤 가해자에 대한 징계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날 대법원 1부는 군인 등의 강간치상 혐의로 기소된 해군 대령 B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던 원심을 깨고 사건의 2심을 맡았던 고등군사법원으로 되돌려보냈다. 반면 같은 혐의로 기소됐던 소령 C씨에 대한 상고는 대법원 3부가 기각하며 무죄가 확정됐다. 해당 재판부는 A씨의 진술에 신빙성이 부족한 정황이 있으며, 혐의를 확실히 증명할 수 없다고 상고 기각 이유를 설명했다.

이에 대해 한국성폭력상담소와 군인권센터 등 10개 단체가 모인 ‘해군 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는 선고 이후 기자회견을 통해 “오늘 대법원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판단을 내렸고, 이는 시대를 역행하는 반쪽짜리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2010년 당시 중위였던 여군 A씨는 함정에서 근무하던 중 직속 상관이었던 B씨로부터 지속적인 성폭행을 당했고, 해당 사실을 알게 된 C씨 역시 성폭행과 강제추행을 저질렀다. 이후 강간치상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대령 B씨와 소령 C씨는 2018년 1심에서 각각 징역 8년과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2심인 고등군사법원은 이들에게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고등군사법원은 무죄를 선고하며 “7년이라는 시간이 경과 후 피해자의 기억에만 의지해 진술한 것으로 사실에 부합하는 진술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피해자가 저항하지 않았고, 가해자에게 강간의 고의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설명한 바 있다. 2심 판결에 불복한 군검찰이 상고해 사건은 대법원으로 넘어왔으며, 약 3년 4개월간 계류된 끝에 이날에서야 결론이 나게 됐다.

공대위는 이처럼 오랜 시간을 끌어왔지만, 같은 피해자의 진술을 두고 다른 판결을 내린 ‘반쪽짜리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박인숙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변호사는 “피해자는 한 사람인데 하나의 판결에서는 신빙성을 인정하고 또 다른 판결에서는 이를 부정하는 것이 상당한 모순”이라며 “오히려 하나의 사건이면 병합을 통해 한 재판부가 맡았어야 했는데 다른 판단이 나온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대법원을 규탄했다.

이러한 대법원의 판단이 ‘정의 구현’을 저버리고, A씨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군 내 성폭력 피해자들을 짓밟았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최희봉 젊은여군포럼 공동대표는 “여전히 신고를 망설이고 있는 이들도 많으며, 실제로 가해자와 조직에 향한 분노로 죽어간 이들의 억울함을 오늘 대법원이 무시했다”며 “이번 판결은 A씨뿐만이 아니라 군의 ‘정의 구현’ 시스템 자체를 무력화한 것이 됐다”고 말했다. 최 대표는 “군은 성폭력이 조직을 와해하는 범죄임을 인지해 가해자에 대한 엄정한 징계를 가하고, 피해자는 일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전우들과 함께 응원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마지막으로 A씨 역시 자신과 같은 일을 군 후배들이 겪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대리인을 통해 전했다. 입장 대독을 맡은 도지현 한국여성의전화 활동가는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하지 않은 판결을 이해할 수 없다”라며 “오늘 다시 한 번 죽었고, 행복한 군인으로 살고 싶다는 희망이 짓밟혔다”고 전했다. 이어 “후배 군인들은 나와 같지 않기를 바라고, 피해를 입더라도 생존자로서 살아남고, 기다림이 길지 않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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