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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제공] "기노사키 온천역입니다."
오전 8시 13분에 오사카역(大阪驛)을 출발한지 2시간 40분여. 깜빡 잠들었다 '기노사키(城埼)'라는 말에 놀라 눈을 떴다. 오전 10시 53분. 차창 밖 하늘에는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먹구름이 가득했다. 역사(驛舍)를 나서자 검푸른 비구름에 물든 듯한 낡은 목조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기노사키였다.
1913년 10월 18일 일본 효고현(兵庫縣) 기노사키(城埼)에 폭우가 쏟아지던 날, 당시 30세이던 작가 시가 나오야(志賀直哉)는 병든 몸으로 이곳을 찾았다. 그는 미키야(三木屋) 료칸(旅館)에서 21일간 머물며 요양을 했고, 이후 당시 경험을 바탕으로 '기노사키에서(城埼にて)'라는 단편을 발표했다. 시가 나오야는 일본 문단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신진 작가들의 모임 시라카바파(白樺派)의 중심 인물로, 이후 '소설의 신' '일본문학의 고향' 등으로 불리는 유명작가 반열에 올랐다. 1971년 사망했다.
시가 나오야는 기노사키에 매료됐고, 미키야 료칸을 사랑했다고 한다. 요양차 첫 방문을 한 이후 그는 10여 차례나 기노사키를 찾았고, 매번 미키야 료칸에 머물렀다.
기노사키는 예로부터 병을 고치기 위해 온천 치료를 하는 장소로 유명했다. 특히 작가들이 많았다. 기노사키에서 내놓은 자료를 보면 쇼와(昭和) 일왕시대 인물로만 한정해도 이곳을 찾은 대표적인 문인과 묵객만 30명이다. 그 말석에 일본의 국사(國師)로 불리는 '료마가 간다'의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가 자리잡고 있다.
지난 7일 방문한 기노사키는 한폭의 묵화(墨畵)였다. 대부분의 건물은 일본의 전통 목조건물. 고개를 들면 마루야마강(圓山川)이 바다가 멀지 않은 것을 알아차린 듯 느릿느릿 흐른다. 기노사키를 에워싼 산에는 온통 안개다.
시가 나오야가 머물렀던 미키야 료칸에서 하룻밤 머물렀다. 70대 할아버지 종업원이 문밖까지 뛰어나와 반겼다. 한사코 사양하는데도 무거운 여행용 가방을 들고 2층으로 안내했다. 2층 다다미방에 짐을 풀고 앉자 '고요함'이 엄습했다. 동해에서 밀려왔을 구름은 비만 잔뜩 머금은 채 하늘에 우두커니 머물고 있었다. 시가 나오야 의 단편에 나왔던 벌집도 사라졌는지 미키야 정원도 조용하기만 하다.
'삐걱삐걱삐걱….'
정적을 깨고 여관 종업원이 오래된 목조 계단을 조심스레 밟으며 올라왔다. 시가 나오야가 머물렀던 방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이곳이 시가 나오야 선생이 머물렀던 방입니다. 이 방은 도로와 면해있지 않은 탓에 조용해서 선생께서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낡은 책상과 책 몇 권, 사망하기 몇 년 전의 얼굴을 담은 시가 나오야의 초상화가 장식의 전부다. 시가 나오야가 늘 앉았다는 자리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에는 이곳에서 글을 쓰거나 사색하는 이외의 어떤 행위도 불경스러워질 것 같은 경건함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목욕 가운을 입고 밖으로 돌아다니기가 부끄럽다"고 하자 여관 종업원은 "들어올 땐 그랬겠지만 지금쯤 나가면 모두 유카타 차림이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미키야를 나서자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쥐 죽은 듯 조용했던 길거리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딸깍딸깍' 하는 게다(일본 나막신)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료칸별로 다른 형형색색의 유카타를 입은 사람들이 좁은 골목을 따라 줄지어 늘어서 소토유메구리를 나선 것이다.
기노사키는 걸어서 25분이면 '기노사키의 끝'에 도착하는 작은 마을. 하지만 역사는 14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노사키에서 작성한 연표에는 1400년에 걸쳐 기노사키를 사랑했고 일본 문학의 전통을 이어온 문인들의 이름이 촘촘히 기록돼 있다.
마을 중심을 흐르는 작은 하천을 따라 올라가면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소토유 '코우노유(鴻の湯)'가 있다. 7세기 중반 황새가 다리에 상처가 났는데 이곳에서 고쳤다는 전설이 붙어있다. 기노사키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이다.
'고우노유'에서 나와 개천을 따라 아랫 마을로 걸어 10분쯤 내려가면 '이치노유(一の湯)'가 나타난다. 에도(江戶) 시대에 '천하제일' 온천으로 꼽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일본 천하를 얻기 위해 각 지역에 할거하던 다이묘(大名)들이 들리곤 했다는 설명도 붙었다. '기노사키에서'라는 단편에도 등장하는 온천이다. 이곳 온천은 수질보다 '이야기'를 더 앞세웠다. 그래서 문인들이 사랑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치노유'를 나서 '미키야'로 향했다. 오후 6시. 방안에는 저녁상이 차려져 있었다. '가니(게)즈쿠시'라는 요리였다. 게 찜, 구이, 스시가 일단 차려졌다.
칼집을 정교하게 넣어 힘들이지 않고 죽 잡아 당기면 길다란 게 다리가 세로로 톡 반쪽으로 잘려서 하얀 속살을 드러낸다. 뒤에 나오는 탕과 죽도 모두 게가 주 재료였다.
게 요리 코스가 다 끝나자 7시 30분. 어느새 바깥은 깜깜한 밤이었다.
"밤에는 대개 뭘 합니까?"
"게를 먹은 후 좀 쉬다 다시 소토유메구리를 하죠."
다시 밖으로 나섰다. 게다 소리는 밤 공기를 타고 더 크게 울렸지만 낮에 비해 다니는 사람은 훨씬 줄었다. 온천 보다는 작은 개천을 따라 양 옆으로 이어지는 골목길 산책이 더 좋을 듯 했다. 낮에 들렀던 '기노사키문예관'을 떠올렸다. 400엔을 내고 들어간 그곳은 시가 나오야가 중심이 돼 움직였던 '시라카바파' 작가들을 중심으로 그 밖에 시바 료타로 등 일본을 대표하는 문인들이 언제 기노사키를 방문했고 어떤 작품에 키노사키를 등장시켰는지 꼼꼼하게 정리해 둔 곳이었다. 그들의 육필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공간은 너무 작았다. 별것 아닌것을 명소로 만드는 놀라운 상술(商術)이라고만 여겼다. 그러나 가로등도 거의 없는 오솔길을 걷다 보니 문예관에서 본 문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뒤를 돌아보면 그들도 어슬렁거리고 있을 것 같았다. 문호들과 같이 산책하는 듯한 행복한 착각에 빠지게 해 준 것만으로도 문예관의 할 몫은 다한 셈.
'상술'인었는지 '배려'였는지 헷갈려하며 미키야로 돌아갔다.
◆기노사키에 가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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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노사키에는 80여개의 료칸이 있다(기노사키온천여관조합 가입 기준). 대부분 체크인 시간은 오후 2~3시다. 오전에 도착하면 여행용 짐이 부담스럽다. 기노사키온천여관조합은 기노사키온천역 바로 앞에 안내소를 운영하고 있다. 료칸 체크인 시간에 앞서 도착한 여행객은 이곳에 짐을 맡기고 가벼운 차림으로 관광에 나설 수 있다. 짐은 이곳에서 예약한 여관으로 체크인 시간에 맞춰 옮겨준다. 료칸 예약객은 무료다.
당일치기 손님은 물건 1개당 300엔을 내고 맡겨둘 수 있다. 자전거(2시간 400엔·1일 800엔)도 빌릴 수 있다. 날씨 변화가 심한 이곳에서 필수인 우산도 무료로 빌려준다. 비어 있는 료칸도 소개받을 수 있다. 대중 온천인 소토유(外湯)는 7개가 있다. 료칸 숙박객에게는 무료이고 단순히 온천만 하러 온 사람에게는 600~800엔을 받는다. 료칸은 겨울에는 1박에 1인당 2만엔, 여름에는 1만5000엔 내외이다. 겨울과 여름의 가격차는 "게 요리가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는 차이"라고 온천여관조합 측은 설명했다. 게의 계절(3월까지)이 끝나면 '타지마규(但馬牛·지역에서 생산된 소고기)' 요리가 주를 이룬다고 한다.
◆여행마켓 플레이스 '옥션여행(tour.auction.co.kr)'은 문학과 예술의 전설이 녹아내린 기노사키 온천마을과 간사이 주요도시를 체험하는 '기노사키 온천마을+간사이 오감체험' 상품을 옥션여행 홈페이지를 통해 판매한다. 옥션여행(http://tour.auction.co.kr) 검색창에서 '간사이 오감체험'을 검색하면 된다. 3박4일 기준 가격 99만원(매일 출발). 문의 1644-6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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