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찮은 방송출연으로 일약 유명인이 된 인디밴드 혁오. 정규앨범은커녕 단독공연 한번 한 적 없다. 오로지 입소문만으로 홍대에서 알아주는 밴드였다. 그러던 어느 날 대중문화 이슈의 한가운데 선 것이다. 첫 출연한 다음날부터 음원차트를 석권하더니 ‘자고 났더니 스타’가 어떤 건지를 제대로 보여줬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들의 부상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이들이 생기더라는 건데. ‘혼자만 알던 밴드를 빼앗겨버렸다’는 게 이유다. 이른바 힙스터(hipster)다. 1940년대 미국 재즈광에서 어원이 비롯됐다지만 요즘은 ‘제멋대로의 취향을 즐기는 이들’을 통칭한다. 이후 이들 힙스터가 취한 방법은 심플하다. 혁오밴드를 버리고 다른 취향을 찾는 거다.
‘하고 싶은 마음이 쏠리는 방향.’ 예전 아니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취향에는 공공성이 강했다. 나의 그것이 다른 이들의 그것과 교집합을 이룰 때 의미가 있어 보였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란다. 취향 중시자가 가장 꺼리는 게 돈만 내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란다. 그 순간부터 더 이상은 내 취향이 아닌 게 된다는 뜻이다. 보편적인 것은 드러내기도 하지만 진짜 특별한 것은 감춘다. 은밀히 가둔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게다. 덕분에 뜬 용어가 있으니 ‘취향 저격’이다. 자신의 취향에 딱 맞는 사람이나 문화·물건·장소를 발견했을 때 ‘저격 받았다’고 말한단다. 그런 발견이 못내 거슬린다면 ‘저격 당했다’고 하겠지.
트렌드분석가인 저자가 라이프스타일을 분석해 내년을 가늠했다. 앞줄에 세운 2016년의 주역은 ‘은밀한 취향을 가진 이들’이다. 흔하지 않은 나와 타인의 취향이 구석구석 깔렸다. 타투로 감각을 내보이기도 하지만 흐르는 강물처럼 살고 싶은 웰(well)족, 한때 X세대로 불렸던 젊어진 40대 ‘영포티’가 사는 세상, 작지만 사실 거대한 욕망을 품고 있는 에지스몰(edge small)족 등. 이들의 취향이 콘텐츠고 비즈니스가 될 거란 말이다.
올해를 뒤흔든 핫아이템이 고스란히 내년으로 전이될 의미있는 ‘싹수’도 뽑혔다. 키워드만 뽑아볼까. 컬러링북, 헬조선(‘지옥+조선’을 뜻하는 신조어), 뇌섹남(‘뇌가 섹시한 남자’란 뜻의 신조어), 스몰웨딩, DIY, 쿡방 등. 내년에는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을 내세운 부족한 자들의 역습이 시작되고, 여전히 다 큰 어른들이 그림책에 색칠을 하고 있으며, DIY 같은 자급자족 열의에 부응할 1인 창작자가 뜬다. 책은 이 모두를 아우르는 독특한 취향, 한마디로 불안시대인 ‘헬조선’에 사는 ‘뇌섹남’이 여전히 백 선생의 ‘설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상에 대한 해석이다.
2016년은 본격적인 취향과 취향소비의 시대가 될 것이란 게 저자의 확신이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등의 SNS가 남다른 취향을 더욱 돋보이게 할 거라고 했다. 하지만 방점은 ‘은밀한’에 찍었다. 바로 ‘취향의 이중성’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 때문에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지 못하고 혹은 유행이 되는 게 싫어서 취향을 숨기는 일이 두드러진다는 뜻인데. 가령 남들이 다 가는 홍대를 떠나 망원으로, 가로수길을 나와 세로수길을 기웃거린다. 곱게 바라보지 않았던 타투로 패션을 삼고, 동성애자들의 퀴어축제도 재미만 있다면 못 갈 이유가 없다. 성 정체성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렇다고 취향을 과시하는 사람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늘 그렇듯 따라하는 이들도 있을 거고.
어찌 됐든 취향이 선명해진 건 사회가 개별적인 욕망에 눈을 떴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분석한다. 취향을 소비하고 취향으로 노출하며 욕망을 채우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소리다. 미덕으로 권장되던 ‘아무거나’의 시대는 갔다.
▲가늘고 길게 살고 싶은 사람들
취향이 그저 취미나 오락거리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생존의 문제와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예컨대 ‘가능한 한 오래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선호하게 될 거란다. 빠른 승진이나 고위급 임원에 대한 선망은 사라지고 있다. 최대한 버티고 정년을 채우는 것이 셀러리맨의 목표가 됐다. 그러니 비즈니스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울트라메가 LTE 시대에 오랜 시간 숙성하고 공들였다는 슬로푸드를 내놓고 새로 오픈하는 가게를 수십년은 된 듯한 스타일로 꾸미기도 한다.
▲전셋집 얻어도 인테리어는 공들여
자못 심각한 진단도 있다. 가장 뜨거운 구조조정의 해가 될 듯하다는 전망. 이미 시작된 장기불황, 기업의 평균수명이 10여년에 불과하다는 통계 아래선 당연한 진단일 수 있다. 살아남으려는 기업의 자구책이 더욱 각을 세우리란 건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생존의 절박함에서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잡으라고 조언한다. 불황 속의 욕망을 포착하란 얘기다. 소비심리의 위축과는 상관없이 저가제품이 잘 팔린다. 백화점보다 편의점 매출이 낫다고 하고. 전셋집을 얻어도 인테리어는 공을 들이며, 내집 마련은 포기해도 2030세대의 외제차 욕구는 갈수록 커진단다.
트렌드에서 중요한 건 속도보단 방향이란 게 저자의 판단이다. 새롭다고 무조건 추종하는 건 더더욱 어리석은 일이다. 숙제처럼 따라하거나 뒤처지면 안 된다는 강박증도 버리라고 충고한다. 아무리 빛나는 은밀한 취향도 세상의 방향과 맞아야 값어치를 한다는 뜻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