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하순 국내 정치권을 발칵 뒤집어 놓고 뉴욕으로 돌아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현지에서도 대권 행보로 비칠 움직임을 그치지 않고 있다. 현재 방미 중인 이해찬 의원이 “차나 한 잔 마시자”는 반 총장의 제안을 받아들여 두 사람이 내일 유엔본부에서 회동한다는 것이다. 공연히 오해를 살 만한 처신으로 빈축을 사는 것이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
반 총장이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당시 외교장관으로 사무총장에 출마했을 때 국무총리였던 이 의원이 그의 선거운동을 지원한 인연이 있으니 만나지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시기가 문제다. 반 총장이 참여정부 핵심 인사를 만나는 것이 2006년 총장 취임 이후 처음이라지만 굳이 이 시점에 친노(親盧) 좌장인 이 의원을 만나 온갖 억측을 낳는 게 바람직한지는 의문이다.
그가 지난번 귀국 때 국내 정치 지도자들을 질타하며 “임기 종료 후 한국 시민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하느냐를 고민, 결심할 것”이라고 밝히자 대부분 언론이 사실상의 대선 출정으로 받아들였다. 김종필 전 총리 예방과 안동 하회마을 방문은 친박(親朴)계의 정권 재창출 전략이라는 ‘충청+TK(대구·경북)’ 연대론의 시동으로 해석됐다. 반 총장은 출국 기자회견에서도 자신의 발언과 행동을 “과대 해석하거나 추측하는 것을 자제해 달라”며 한 발 빼는 듯했지만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별로 없었다. 전형적인 ‘치고 빠지기’로 유엔 회원국들이나 외신의 공세에 대비하려는 면피용이었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이번에 그가 다시 이 의원에게 손을 내민 것도 앞으로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화제를 몰아가며 대선 판도의 중심에 서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출로 읽힌다. 아울러 불편한 사이로 알려진 친노계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자신이 여권 후보로 굳어지는 듯한 항간의 분위기에 제동을 걸어 몸값을 높이려는 의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 최대 국제기구의 수장에 오른 대한민국의 귀중한 자산이 경솔한 행동으로 본인과 국가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은 피해야 한다. 반 총장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7개월도 안 남은 임기를 잘 마무리해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이다. 더 이상 말장난으로 국민을 우롱해선 안 된다. 진정 대권에 뜻이 있다면 퇴임하고 나서 움직여도 늦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