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가 상대방을 공격할 때 흔히 쓰는 표현입니다. 줄여서 ‘내로남불’이라고 부릅니다. 저작권자는 박희태 전 국회의장입니다. 말년이 불명예스러웠지만 박희태 전 의장은 우리 정치사에서 보기 드문 명대변인 출신입니다. ‘총체적 난국’이나 ‘정치 9단’이라는 촌철살인의 표현도 박 전 의장의 작품입니다. 뜬금없이 ‘내로남불’을 꺼내든 것은 개헌을 대하는 여야 정치세력의 이율배반적 태도 때문입니다.
대통령 탄핵소추안의 국회통과 이후 여의도의 관심은 오로지 차기 대선입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변수로 남았지만 내년 상반기 조기대선은 유력시됩니다. 최대 변수는 개헌입니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봇물을 이루고 있습니다. 개헌은 여소야대 지형의 3당 체제를 뒤흔드는 정계개편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대한민국에 개헌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서른살 나이를 먹은 현행 헌법은 사실 손볼 데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래도 개헌은 불가능합니다. 현 시점에서 개헌을 시도하더라도 성사되기 어렵습니다. 권력구조 개편이라는 ‘원포인트 개헌’은 위험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정계개편이나 제3지대 후보단일화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돌이켜보면 박근혜 대통령을 끌어내린 촛불민심이 과연 개헌을 이야기해왔는지 의문스럽습니다. 광장에는 새로운 대한민국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존재했을 뿐입니다.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개헌은 언제나 ‘내로남불’
여야는 대선이나 총선 이후 정치적 입장이 180도 달라집니다. 인사청문회가 대표적입니다. 보통 야당은 창을, 여당은 방패를 듭니다. 그러나 정권교체가 이뤄지면 안면몰수가 이뤄집니다. 야당이었던 여당은 방패를, 여당이었던 야당은 창을 듭니다. 국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수결 원리를 강조하던 과반 여당이 소수당이 되면 ‘거대 야당의 횡포’라고 반발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행정부 견제를 강조하던 소수 야당이 집권하면 ‘지나친 국정발목 잡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전형적인 아전인수입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개헌은 대표적인 ‘내로남불’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이후 개헌 반대론자였습니다. ‘개헌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라는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개헌을 거론했을 때 반발한 게 대표적입니다. 앞서 노무현 대통령이 참여정부 말기 개헌을 요구했을 때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일축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던 대통령이 입장을 뒤집었습니다. 지난 10월 24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임기내 개헌 완수’ 발언으로 정국을 뒤흔들었습니다. 약효는 하루도 못갔습니다. 이후 최순실 국정농단 파문의 여파 탓입니다.
되돌아보면 권력구조 개편을 위한 개헌의 최적기는 참여정부 말기였습니다. 2007년 12월 대선과 2008년 18대 총선까지 불과 4개월의 차이밖에 없었습니다. 대통령 노무현의 개헌 제안에 여야 차기 주자들은 대부분이 반대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당시 개헌에 가장 강력 반대했던 정치인들은 최근 열렬한 개헌론자로 변신했습니다. 아울러 그 당시 개헌추진을 요구했던 정치인들은 개헌 시기 부적절론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개헌은 국가 백년대계입니다. 정파적 이익에 따라 휘둘리는 ‘내로남불’ 신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탄핵정국 속 경제·안보위기…개헌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현 상황에서 과연 개헌이 가능할까요. 상황은 만만치 않습니다. 대통령 직무정지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체제가 갖고 있는 불안정성입니다. 벌써부터 황교안 대행의 국회 출석여부 등을 놓고 신경전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탄핵정국 속에서 여야정은 물론 여야, 야야간 정치적 파열음 또한 적지 않습니다. 아울러 더 큰 문제는 대한민국의 경제·안보 상황입니다. 미국의 금리인상, 1300조에 이르는 가계부채, 사드배치를 둘러싼 미중의 외교적 압박, 언제 되풀이될지 모르는 북한의 추가도발 등등. 경제·안보 쌍끌이 위기 속에서 차기 대선이 언제 치러질 지도 모르는 유동적인 상황인데 한가하게 개헌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의문입니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5년 단임 대통령제는 정말 문제인가
현행 대통령제를 흔히 제왕적 대통령제라고 말합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규정한 헌법 1조 1항을 고려하면 역설적입니다. 헌법은 절대 왕정이 아닌 민주 공화정을 분명히 말하고 있지만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권한은 막강합니다. 입법·사법·행정의 삼권분립은 허울이고 국가권력의 대부분은 사실 대통령 권력입니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등 87년 이후 모든 대통령은 임기초 막강 권력을 누렸지만 임기말 극심한 레임덕 속에 불행한 대통령으로 청와대를 떠났습니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고치지 않고서는 대한민국이 한 걸음도 진전할 수 없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룹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를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로 돌리는 것은 너무 극단적이고 단순한 주장입니다.
5년 단임 대통령제는 87년 체제 당시 1노3김의 산물입니다. 일단 대통령 중임제나 연임제의 경우 특정 정치인의 장기집권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 탓에 선호도가 크지 않았습니다. 실제 노태우-김영삼-김대중의 순으로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김종필만이 실패했지만 대통령에 버금가는 실세총리였습니다. 1노3김의 대통령 단임제 합의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시기였습니다. 5공화국의 7년 단임제는 너무 길고 그렇다고 4년 단임제는 너무 짧았습니다. 결론은 5년 단임제였습니다. 장점도 없지 않습니다. 유권자의 눈치를 볼 일이 없습니다. 문민정부 당시 김영삼이 대표적입니다.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역사바로세우기 등등. 만일 김영삼이 재선을 고려했다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5년 단임제의 대안으로 흔히 거론되는 게 대통령 4년 중임제입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국민 선호도도 가장 높습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 불일치 문제를 해소할 수 있고 레임덕 없이 국정의 연속성이 보장된다는 장점 때문입니다. 그러나 8년 독재가 될 것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첫 임기 4년은 재선을 위해 온갖 선심성 포퓰리즘 정책을 총동원한 뒤 재선에 성공하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맘대로 정치를 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입니다.
◇헌법전문·영토조항·기본권 등 전면적 개헌 논의도 가능할까?
대표적인 게 헌법전문입니다. 1948년 8월 15일을 헌법 전문에 어떻게 명시하느냐에 따라 건국절 논란이 종지부를 찍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수진보의 대충돌은 불가피합니다. 영토조항도 해묵은 과제입니다.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라는 헌법 3조에 따르면 북한은 미수복지역입니다. 다만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으로 북한이 정식국가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논란이 없지 않습니다. 이밖에 지방자치와 경제민주화 강화, 교육·의료의 공공성 개선, 국민 기본권 보장, 환경권과 평등권 등 손볼 곳이 한둘이 아닙니다.
역대 정부 때마다 논란을 빚어온 검찰개혁 문제 역시 헌법에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신설을 명문화하면 해결됩니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헌법 제11조의 평등권 조항과 사법부 판결을 무력화시키는 대통령의 특별사면논란은 헌법 제79조를 삭제하면 손쉬운 문제입니다. 아울러 삼권분립을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 대법원장과 헌법재판소장을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는 게 아니라 사법부 자체 결정이나 국회가 임명하는 방식을 고려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이러한 조항의 개헌논의는 말이 쉽지 구체적 논의로 들어가면 합의도 너무 어렵고 후폭풍도 예측불가 수준입니다.
◇“‘권려구조 개편’ 개헌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너무나 많다”
권력구조 개편은 간단합니다. 대통령을 국가원수·행정부 수반으로 규정한 헌법 제66조와 대통령의 임기는 5년으로 중임 불가 규정을 둔 제70조를 고치면 됩니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는 개헌보다 더 중요한 문제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구조 개편이라는 원포인트 개헌을 하고 싶다면 정치권이 진정성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거칠게 이야기하면 헌법 제8조 3항을 삭제해야 합니다.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정당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보조할 수 있다”는 조항입니다. 이에 따라 국가는 주요 정당에 선거보조금과 경상보조금을 지급합니다. 정치자금 모집을 핑계로 이뤄져온 재벌과의 정경유착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선거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은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당의 평상시 활동에 과도한 국가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여야 주요 정당은 수백만 당원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당 살림은 사실상 혈세에 의존합니다. 당원들도 잘 내지 않은 돈을 왜 국민이 내야 하나요. 향후 개헌 과정에서 이 조항을 완벽하게 삭제할 용기가 있나요?
개헌 좋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개헌보다 더 중요한 문제들은 대한민국 도처에 널려있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세상입니다. ‘헬조선 흙수저’로 상징되는 빈부격차와 양극화의 해소가 가장 절실한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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